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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May 13. 2020

저릿한 자극을 주는 남자

절친이 보낸 카톡 메시지


"내 가족 미살리기도 바쁜데, 니 결혼식을 챙길 시간이 어디 있노."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놈이다. 누군가 내게 평생 함께 갈 친구가 몇 명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세 명을 말할 것이다. 그중에 한 놈이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지금까지 우정을 쌓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쓰인다. 작년 11월 30일, 결혼식날 녀석은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그 친구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니까.


친구는 어렸을 적부터 집안 분위기가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도배나 샤시 작업을 주로 하셨는데, 노동 시간에 따라 급여가 틀렸다. 월급 받는 날이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술로 모든 돈을 탕진했다. 가끔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아, 이번 달 월급도 저렇게 날렸구나.'라고 알 수 있다."


그 덕분에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활비를 보탰다. 입학하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늘 수업에 집중 못하고 종일 반수면상태로 보이는 녀석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도 크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버지는 고향인 대구 어딘가의 시골로 떠나셨다. 홀로 남은 친구는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단순 노동부터 용접, 피시방, 술집, 노래방, 에어컨 공장 외 다수. 아, 친구의 중요한 신체적 특징을 말하지 않았는데, 키가 194센치다.


친구는 진득한 사랑을 꿈꿨고, 이내 이뤘다. 긴 연애기간이 이어졌다. 함께 평생 사는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여자 친구 집에서 강하게 반대했다. 둘은 뒤돌아 뛰었다. 쉽지 않겠지만, 둘이서 함께 한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지금 그들 곁에 있는 아이를 출산했다.


나는 태어나고 일주일채 안된 시점에 처음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남루한 어느 숙소에서. 마음이 저렸다. 친구는 고민했다. 잘 키울 수 있을까, 하고. 나랑 닮은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나는 "까불지 말고,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직장도 이곳저곳 바꾸지 말고, 진득하게."라고 타박했다. 그렇게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뒷모습이 똑같다. 근데, 앞모습은 더 닮았다.





그 아이가 어느새 올해 여덟 살이 되었다. 코로나 19 여파만 아니었어도, 초등학교 1학년으로써 당당한 걸음을 시작했을 텐데 아쉽다. 한 직장에서 근무한지도 8년이 되었다.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데,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월급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받는다.


주말이면 일반인 농구팀에 들어가 센터로 중심을 잡는다. 아들도 농구를 좋아한다. 세 사람 모두, 긴 시간을 잘 견뎌냈다.


작년 결혼식을 앞둔 일주일 전,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아들이 아빠를 대신해 멘트 했다. "보현아,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리고 촬영하는 친구 쪽에서 "자, 이제 씻으러가~"라는 말에 바로 "응!'이라 대답하며 짧은 영상을 끝맺었다. 친구 말로는 그것으로 결혼식 참석부터 모든 절차를 퉁, 쳤다고 말했다. 황당했지만 썩 기분 나쁘진 않았다.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마주 보고 대화를 못 나눈 지 3년이 훌쩍 넘었다. 늦지 않은 시간,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금 소주잔을 부딪치며 그간의 인생을 논하고 읊을 것이다.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내게 늘 저릿한 자극을 주는 녀석과의 만남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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