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저 어떡해요?
야심한 밤이었다. 오랜만에 걸려온 후배 전화였다. 목소리가 제법 떨렸다. "왜, 무슨 일인데?" 후배는 몇 번 호흡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랑에 빠졌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사랑에 빠졌다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적당한 리액션을 곁들여 다소 영혼 없는 반응으로 일관했겠지만, 이 녀석에겐 다를 수밖에 없다. 어렸을 적부터 늘 가정형편과 자신의 외모 비하 외 모든 부분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랑은커녕, 인간관계에 있어서 늘 어려움이 많았다.
몇 해전에는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심리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늦은 밤이면 전화기 너머 한참 울먹이는 후배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저리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들었다. 그렇게 울다가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라고 질문하면 "사랑을 해봐. 그럼 될 거야."라고 답했다.
좋은 답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답해버렸다. "저 같은 사람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라고 되물으면 "사랑에 빠진다는 건 아주 좋은 거고, 그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고 생각해."라고 덧붙였다.
그런 후배가 빠진 사람은 도서관 사서였다.
책벌레라는 별명답게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던 후배는 어느 날, 익숙했던 직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낯선 사람이 존재함을 알게 됐다. 창가 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썩 나쁘지 않았다. 책 대신 그녀를 살폈다. 몇 개월간 그렇게 관찰한 내용을 내게 차근차근 보고했다. 단발머리,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고, 눈가에 웃음 자국이 묻어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어서일까. 요즘은 읽는 책마다 '사랑'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고. "사랑은 그 여정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한참 후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나도 언젠가 그렇게 잔뜩 사랑에 빠졌던(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나날들이 떠올랐다.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지고 난 뒤, 우울감이 사라졌고 복용 중인 약도 줄여가고 있다. 물론 그녀와의 관계는 이제 시작이고, 일반적인 짝사랑일 수 있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다른 사랑에 빠진 친구들에 비해 결코 서두르지 않는 후배를 보며 안심했다. 되려 초조해하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 "형, 오늘 처음으로 인사했어요. 웃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