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프카 Apr 12. 2021

도전하는 당신의 시그널 '슬럼프'

​"지금도 매일 슬럼프와 싸우고 있어요."

살면서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이 온다면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살면서 한계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은
한계에 도달할 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계를 맞닥뜨리는 것은 내 좁은 테두리를
넓힐 기회를 쥐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계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아프도록 기쁠 뿐이다.

위서현, [뜨거운 위로 한 그릇]  중에서


온종일 글감이 맴돈다. 이것저것 쓰고 싶은 것들이 꿈틀거린다. 운전을 하면서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에 무언갈 쓰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짬을 내 강연을 봐도 시선에 잡히고 귀에 들리는 것은 '글'이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덕분인지 모르겠다. 



어제 순천을 방문했다. 오랜만이었다. 그리웠던 분들을 만났고,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중간에 "요즘 슬럼프가 찾아왔어요."라고 말하는 분이 계셨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최근 작성했던 글럼프(글쓰기 + 슬럼프)가 떠올랐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의 결론은 "너무 무리하지 말자. 적당히 해도 괜찮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도 매일 슬럼프와 싸우고 있어요."


그간 느꼈던 부분을 찬찬히 말했다. 이십 대만 하더라도 슬럼프가 찾아오면 '실패의 시그널'로 인식했다. 한참 한숨을 쉬며 스스로를 탓했다. 허망한 꿈이진 않았을까, 한참을 목놓아 울부짖었던 때도 있었다. 비틀거렸고 주춤했다. 겨우겨우 회복해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어떨까. 나이도 한두 살 먹고, 착실히 찾아오는 슬럼프를 조금 더 다른 시그널로 이해하게 됐다. 여기까지가 한계구나, 라는 푸념에서 한계까지 도전하고 있구나,라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실패의 시그널이 아니라 성장의 시그널로 받아들였다. 물론 여전히 힘들고 주춤한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는 솔직한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더 나아지지 않고, 정체한다. 그게 더 두렵고 무섭다는 걸 알게 됐다. 슬럼프가 없는 사람이 더 위험한 사람인 것이다.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 않을까. 슬럼프와 고난의 연속. 그것을 대면하는 자세를 조금 더 유연하게 다듬어 가는 것이 삶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간헐적인 기쁨과 성취감만을 기다리면 괴롭다. 위태롭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나 자신에게 위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지금 내 수준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서두르지 말자. 대신 품었던 꿈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라고. 이십 대 시절부터 쓰러지고 좌절할 때마다 가슴에 아로새겼던 문장을 소개하며 대화를 마쳤다. 


"청춘의 패배란,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이 나를 거부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