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문장을 짓기 위해

지난여름의 기억과 <모든 요일의 기록>

by 춘프카
“한 줄의 문장을 짓기 위해
오늘도 수백 개의 감각과
기억을 사용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2017년 6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운동과 출퇴근을 겸할 요량으로 샀던 자전거를 타고 시내 서점으로 향했다.


도착 후, 두리번거리며 원하는 책을 찾아다녔고, 한쪽 구석에서 발견했다. 지인이 귀가 따갑도록 추천했던 책이었는데, 글쓴이가 카피라이터라 그런 걸까? 책 표지를 시작으로 내용 곳곳에 정성 들여 쓴 문장들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탁월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한참을 감탄했다.


p.77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 읽고 싶었지만, 마저 읽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양림동의 빛바랜 한옥집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 자리에서 <모든 요일의 기록>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다.




p.30

“내가 신기한 책 하나 보여줄까?”

그리고 남편은 책 한 권을 꺼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아니 수없이 본 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자본론>이었다. 그런데 책이 이상했다. 책이 아팠다.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갖은 방법을 통해 고문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책으로 재현한다면 그 모습일 것 같았다. 아니, 고문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소중히 읽었다는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소중히 한 글자 한 글자 쓰다듬으며 읽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읽었으면, 얼마나 잘근잘근 씹으며 읽었으면,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좌절하며, 희망하며, 다시 좌절하며 읽었으면 책이 이럴까. 모든 장이 손때가 덧입혀져서 부풀어 있었다. 종이 한 장보다 손때의 두께가 두꺼웠다. 제본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가다듬고, 다시 떨어지고, 다시 가다듬은 흔적들이 보였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시간을 산 것일까. 80년대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경제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그 청년은 어떤 시간을 견딘 것일까. 언제나 정중하게, 언제나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고, 말하기보다는 듣는 모습이 더 익숙한 선생님은 어떤 시간을 통과한 것일까. 아득했다. 몇 번 뵌 적도 없고, 오래 말해본 적도 없는 선생님이었지만 갑자기 선생님의 모든 시간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책 한 권이 그랬다. 글자 한 자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책은 모든 것을 제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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