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心尋), 마음을 찾는 시간 3화(글 : 이레네)
안녕하세요. 야자수가 펼쳐진 파란 하늘 아래, 각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며 이 편지를 씁니다. 매번 집에서 글을 끄적이다 오늘은 카페에 나왔어요.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네요. 그래서일까요? 이 편지는 메일이 아닌 유리병에 고이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내는 기분 마저 드네요.� 저의 추억이 태평양 건너 무사히 가닿기를. 오늘도 부디 안녕하세요. 저도 안녕할게요!
그 날 오후,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년 내내 더운 나라인 파나마에서 땀을 흘리는 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날은 달랐다. 그건 진짜, 정말, 비지땀이었다. 이유는 모두 팥 때문이었다. 열두 시간 물에 불리고, 두 시간 약불에 뭉근하게 끓여야 하는 팥.
발단은 유튜브에서 본 '추억의 광고'였다. 우연히 맞딱뜨린 20초 남짓한 영상을 보고, 나는 90년대 중반의 어느 겨울날을 떠올렸다.
그 날은 눈이 많이 내렸고, 나의 생일이었다. 아빠와 엄마, 나는 동네 유일의 경양식 집에서 밥을 먹었다. 가게 이름이 '아마데우스'였나, '헨델'이었나 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호기로운 상호명과 달리 맛은 '브레멘 음악대'에 더 가까웠다. 처음으로 경험한 비후까스는 기대보다 별로였고, 식전에 나온 수프는 집에서 해먹는 오뚜x 스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 저녁 식사를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부엌을 어슬렁거렸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뭔가 섭섭했다. 귤이나 동치미, 뻥튀기 과자 따위로는 채워지지 않는 종류의 허기였다. 결국, 먼저 잠든 엄마 몰래 아빠와 난 대문을 나섰다. 배가 고픈 상태로 잠들 수 없는 건 먹보의 제 1 법칙이었고, 아빠와 나는 김씨 가문 대대로 계승되는 먹보들이었으니까.
붕어빵이 좋을까, 국화빵이 좋을까. 아니다, 군고구마가 낫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다른 때와 달리 길거리는 조용했다. 종일 차곡히 쌓인 눈 때문인 듯 했다. 그렇게 기대에 한껏 부풀었던 나의 마음이 점차 납작해지던 찰나, 아빠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호빵 무글까, 호빵?"
투명한 전용 찜통에서 오래 오래 쪄낸 호빵은 뜨거웠다. 나는 구멍가게 주인에게 주머닛 속 동전을 털어 건네는 아빠를 바라보며 호빵 표면 위 살짝 일어난 껍질을 벗겼다. 얇은 막이 무척 찰지고 쫄깃했다. 어느새 계산을 마치고 온 아빠와 나는 가게 앞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시렵던 손에 닿은 호빵의 열기가 너무나 따뜻해 절로 웃음이 났다. "여 줘봐라. 아빠가 해줄게." 아빠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뽀얗고 봉긋한 호빵을 뚝, 반으로 갈랐다. 그러자 안에 있던 달큰하고 고운 앙꼬에서 하얀 김이 펄펄 솟아 올랐다. "자, 생일이니까 니 큰 거." 아빠가 쪼끔 더 큰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우리는 각각 야채 호빵과 팥 호빵을 반씩 나눠 먹었다. 뜨거워서 입을 벌린 채 후후 불어 먹었다. 그건 설탕에 졸인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나 비싼 비후까스보다 맛있었고, 나는 그 날부터 '겨울'을 떠올리면 호빵 생각에 침을 꼴깍 넘긴다.
다시 파나마.
땀 흘리며 만든 팥 앙금을 식히는 사이, 빵 반죽을 준비했다. 유튜브에서 찾은 레시피는 의외로 간단했다. 밀가루와 베이킹 파우더, 소금, 설탕, 우유, 그리고 식용유를 배합하여 팥 앙금을 넣고 십오 분 간 찌면 끝이었다. 과연 이게 될까 싶었는데 결과는 예상 밖의 성공이었다. "뭐야, 이거 이렇게 쉬운 거였어?"
음식은 무얼까. 에너지를 얻고, 굶주림을 가시게 하는 원초적 목적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그건 아마도 추억일 것이다. 작가 김훈은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라면을 끓이며 / 김훈
겨울도 아닌 여름, 아빠 없이 홀로 머나먼 타국에서 먹는 호빵이지만 추억을 떠올리기엔 충분했고, 나는 오래 오래 그 옛날의 하얀 밤을 곱씹었다.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으나 아빠를 사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을 찾아낸 것만 같았다.
※ 브레멘 음악대: 그림 형제가 쓴 고전 동화로, 당나귀, 개, 고양이, 닭으로 구성된 음악단(?).
※ TMI) 그 눈 내리던 밤, 아빠와 나는 호빵 일곱 개를 먹어치웠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 | 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