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의 글쓰기 대부분은 연애편지였다. 밑줄 그었던 시집 내용을 정성스레 편지지로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평소 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녀석이 한 명 있었는데, 3일간 무단결석을 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반응은 일관됐다. ‘그런 놈인 줄 알았다’고 비아냥 거렸다. 나는 궁금해졌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확인하고 싶었다. 학교 내에서는 정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을 물어봐 겨우 집주소를 알아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주소지를 찾아갔다. 도심을 벗어나 숲이 무성한 산동네였다. 겨우 도착하여 위태롭게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었다. 곧장 내 시선에 잡힌 것은 친구의 어머니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해 보이셨다. 친구는 집을 나간 지 며칠 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단다. 어머니는 수년 전 사고를 당해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도 말하셨다. 아주머니 곁에 있던 7살짜리 여동생은 내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라 말하고 나왔다. 수소문 끝에 친구의 행선지를 파악했고, 만날 수 있었다. “돈을 벌어야 된다.” 어색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일단 알겠다, 다들 걱정하니까 집으로 우선 들어가,라고 말하고 서둘러 나왔다. 마음 같아선 더 듣고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냥 와버렸다.
다음 날, 담임선생님께 친구와 집안의 상황을 전했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자리를 피하셨다. 황당했다. 심지어 며칠 뒤 친구를 퇴학시키겠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가 치밀었다. 교무실을 찾아가 “이건 아닙니다. 00의 집을 찾아가 사정을 듣고 다시 결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한 선생님이 침묵을 깨고 터벅터벅 내게 다가왔다. 다정한 답변을 기대했던 나는 다른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의 두꺼운 손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네가 뭔데 난리고? 그런 놈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니부터 똑바로 살아라.”
맞은 뺨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타인의 삶에 동고 하고 그 마음 때문에 분노했던 순간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글을 썼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다짐하며. 도교육청 홈페이지에 내가 봤던 친구의 상황들을 써서 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진심을 담아 친구를 위해 쓰는 것, 그것뿐이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다 쓰고 나니 힘이 빠져버렸다. 이 방법도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번민하고 있는데 다음날부터 내가 쓴 글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교육청 관계자들이 학교를 찾아왔고 친구의 집을 실제로 방문해 여러 상황을 파악했다. 며칠 뒤 거짓말처럼 친구는 학교를 다시 나왔다. 물론 졸업식도 함께했다. 그날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라는 문장처럼. 연애편지의 성공 여부에서 느껴지는 짧은 여운과는 다가오는 파동이 사뭇 달랐다. 누군가를 위해 쓰는 글, 조금이라도 내가 속한 세계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겠다는 다짐. 그때의 결의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