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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Jul 09. 2019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거예요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어떤 주제로 써볼까 고민하다 말았다. 딱히, 떠오르는 부분은 없다. 대신,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두 번째 읽고 있는데 느끼는 바가 크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듣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일까.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작가의 행동과 마음을 읽으며 나의 행동을 비교해보았다.


나는 한 달을 기준으로 몇 명을 만나고 얼마나 격려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렇지, 내겐 다이어리가 있으니까.’ 당장 6월 일정을 살펴봤다. 대부분 누구를 만났으면 짧게라도 기록해놓았으니, 도움이 컸다. 자료 조사(?)를 끝내고 평균을 내보니, 한 달에 서른 명 정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는 처음 대면하는 분도 있고 몇 개월에 걸쳐 거듭 만나는 분도 있다. 만나면 대부분 내가 고민을 듣는 편에 속한다. 크고 작은 여러 고민들을 경청하고 한동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 힘들었다. 분명 나는 지금 행복한데, 불행한 분의 이야기를 잔뜩 듣고 귀가할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오늘의 만남을 통해 과연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도움되었을까 하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했다.    


<당신이 옳다>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이나 고통을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은 게 하나도 없어.”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 -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 -평판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니?” -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 -충조평판    


작은 고민부터 시작해 곧 죽을 듯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부모나 교사들 때로 상담가들도 충조평판을 날린다. 친구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도 책을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고통 속에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충조편판의 잣대를 들이밀며 다그친다. 내가 너에게, 나도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충조평판을 빼면 달리 할 말이 없어서다. 충조평판이 도움이 될 거라 믿어서라기보다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일 때가 더 많다.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처럼 끊어진다.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노느니 장독 깬다고 충조평판이라도 날려보는 것이다. 그러니 끼니처럼 찾아오는 일상의 갈등과 상처가 치유될 리 만무하다. 덧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찾는 수사관처럼 내 언어가 끊어진 벼랑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별로 필요치 않다.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사실 지금 그의 상태를 내가 잘 모르지 않는가.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 거니?”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래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격려는 어땠을까.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부족한 부분들이 보였다.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의 고민을 마주할 때,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말은 '상대방의 말'이다. 내가 힘이 들고 마음이 울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답을 신나게 알려주는 상대방이 아니라, 온전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아파하는 선배에게 더 마음이 같고, 치유받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마지막 호소를 기록하며 나도, 그 '한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한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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