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부서지며 반짝이고
마지막은 무엇이든 애틋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10일간의 여행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은 기억.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고 싶을 때 이날을 떠올린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를.
원래 계획대로라면 몬주익 성으로 가야했다. 사진으로 봐도 웅장한 모습, 높은 곳에서 바다도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환승을 몇 번 해야 했는데 교통카드 횟수는 애매하게 남아있었다. 마침 숙소에서 조금만 오래 걸으면 바르셀로네타 해변. 그냥 다 치우고 바다로 향했다. 울산에 살면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다인데도, 바다 근처에 살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바다로 간다.
벌써 바르셀로나에 온 지도 4일째, 내일이면 리스본으로 떠나는데 날씨가 가장 좋았다. 전날의 풍경이 비에 젖어 더 깊은 모습이었다면 이날 마주친 도시의 색은 더욱 생생했다. 거리낌 없이 내리쬐는 빛 아래 선과 색이 모두 분명해진다. 건물과 식물, 사람 모두 한국과 다소 다른 팔레트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알록달록하고 선명한 색이랄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숙소에서 나선 게 아마 오전 7시쯤. 날씨도 기분도 신선했는데, 한국에서도 이렇게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하루를 더욱 건강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다. 시차 적응 덕에 강제 갓생 실천 중. 망원경과 이름표를 다부지게 맨 아들과 이른 오전의 도시를 걸었다.
2월에 가는 여행이라, 울창한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곳은 제법 푸르렀다.
"저기 봐- 초록색 새도 있다!"
크고 무성한 나무 아래 앵무새처럼 보이는 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함께 도보를 걷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 이국적인 나무와 새.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니 점점 큰 건물들이 나오고 놀이터가 또 하나 등장했다. 녀석이 놓칠 리 없었다.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춰 운동(비슷한 것)을 하고 놀이터가 나오자 한번 더 멈췄다. 우리 여행의 테마 중 하나는 놀이터가 아닐까. 아이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라, 구글맵에 눈길을 끄는 큰 점이 있다. 근처에 명소가 하나 있단다. 빠른 길은 아니었지만 하나라도 더 보려고 길을 살짝 틀었다. 건물을 몇 개 지나자 멀리서도 윤곽을 드러낸다. 엄청나게 큰 문. 다양한 모습의 러너들이 개선문을 통과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개선문을 따라 쭉 뻗은 넓은 길. 지나쳐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 우리처럼 일찍 나온 관광객도 여럿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한참 찍고 있으니, 훤칠한 외국인 커플이 사진을 부탁했다. 그간 '한국인들에게 사진을 부탁해야 하는 이유.jpg'를 자주 봐온 사람으로서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몇 컷 찍어드렸다. 보다 잘 찍는 분들을 워낙 많이 봐온 터라 실력이 그닥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글로벌하게 볼 때는 조금은 상위권이 아닐까 생각하며, 정성 들여 찍었다는 점을 알아주셨기를.
큰 공원 하나를 지나자 바다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목적지는 해변의 놀이터. 무료로 쓸 수 있는 화장실도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맘 놓고 놀 수 있을 거야. 아들은 아침부터 에너지가 넘친다. 러너들을 쫓아 달려가는 그를 멀찍이서 바라본다.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싶다.
멀리서 보았던 반달 모양의 건물이 더욱 가까워졌고, 놀이터는 커다란 그물 하나가 다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모래사장 옆 운동기구존에서는 각국의 헬스 마니아들이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동양의 꼬마는 거침없이 그들 곁으로 가서 해볼 만한 운동기구를 이것저것 즐겼다. 큰 어른 중 몇몇이 미소를 보낸다.
모래사장은 언제나 커다란 품이다. 모래를 헤집다가 어느덧 성을 만드는 녀석을 뒤로하고 눈에 보이는 작은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각 나라 해변마다 각기 다른 조개껍데기가 있다고 들었던 게 떠올라서. 보석을 찾듯 하나씩 주워 손에 담는다. 손바닥 위에 조개껍데기와 햇빛이 다각다각 내려앉았다.
"엄마, 나 바다 들어가 볼래!"
이곳의 이른 햇살과 바다가 준 힘이었을까. 평소엔 내가 가자고 해도 안 가던 아이가 먼저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말한 것은 우리 주변의 어른들처럼 옷을 훌렁 벗고 들어간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와중에 나보곤 짐을 지키고 있으라며. 나는 곁에 짐과 망원경, 옷을 들고 낮게 깔린 바위에 앉아 아들의 바짓단을 올려주었다. 발과 다리를 꺼내고는 저만치 바다로 달려간다.
시간이 지나자 주위에 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여러 나라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모이고, 젊은 외국인 청년들은 입수를 하기도 했다. 2월의 바다 입수. 낯선 광경이었지만 간편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이것저것 챙겨 오지 않고도 훌렁 벗고 첨벙 뛰어드는 사람들. 때론 너무나 많은 필요에 겹겹이 쌓인 기분인데, 역시 답은 매번 간단했다.
파도는 늘 그렇듯 밀려들어오고 다시 돌아간다. 아이는 그걸 보고 말했다. 파도가 자꾸 나한테 놀자고 해. 그치?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알아채지 못해서 그렇지, 자연은 언제나 말을 건다. 자신만의 고요한 방식으로.
아들이 파도와 오가며 노는 동안 틈틈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큰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스피커와 깃발을 멘 사람이 보였다. 그들을 포함한 많은 러너들이 해변가를 달려 우리 옆으로 왔다. 그리곤 음악에 맞춰 스쿼트를 하기 시작한다. 저스틴 비버의 baby가 오전의 흥을 더욱 돋웠다. 기분 좋은 함성과 웃음을 끝으로 그들은 다시 그들의 길을 가고 빈 모래사장은 다시금 본연의 소리를 찾았다. 문득 돌아보니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람이 있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바다 한가운데 명상이라니. 해보고 싶은 것이 이렇게 하나 더 는다.
파도 가까이 들어갔다가, 물이 닿을라 와다다 도망가는 녀석을 보고 있던 게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서양인 아저씨가 옷을 훌러덩 벗으시더니 아이에게 가서 손을 내밀었다. 아들은 파도에게서 도망가던 그 스피드로 다시 도망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모양새로 아저씨는 성큼성큼 바다로 들어갔다. 보고 있자니 지금이 어느 계절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물결을 따라 조잘거리는 빛, 젖은 모래 위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때.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여전히 겨울이라는 생각에 선뜻 아이의 옷을 더 벗기지 못했다. 햇볕은 점차 무르익고 무엇보다 엉거주춤 바지를 잡은 손이 불편해 보이긴 했는데.
철썩 -
악...!
조금 큰 게 내리치나 싶더니 우려하던 사달이 일어났다. 파도를 놀리고 도망가다 엎어져 흠뻑 젖은 아들. 지켜보던 부부는 하하하- 웃고 나는 웃음기 머금은 비명을 질렀다. 축축이 젖은 아이는 부리나케 내게로 달려온다. 갈아입을 옷도, 닦을 수건도 없었다. 근데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괜찮아. 차라리 잘됐어. 다 벗고 놀래?"
이상하게 평온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벗어내고 바다와 한 몸이 된 아들을 두 눈에 담는 동안, 나 역시 무언갈 벗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바다로 인도해주려 했던 아저씨는 "Enjoy your vacation-"하시고는 아내와 함께 미소 띤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그들 덕에 더욱 동화 같았던 오전.
이미 자연 그 자체가 된 아들은 바람이 부니 좀 추웠나 보다.
"엄마 여기 누우면 따뜻해."
하고 모래사장에 벌러덩 눕는다. 햇살 아래 노릇노릇 굽혀지고 있었다. 조금씩 바람이 차가워진다 느낄 때쯤 슬슬 정신이 들어 근처 옷가게를 살폈다. 아이를 불러 우선 맨 몸에다 젖지 않은 패딩 조끼와 청바지를 입히고 (마치 근육질 남자 연예인 스타일처럼)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머지않아 문에 걸린 어린이용 후드티가 보인다. 이토록 반가울 일인지. 가게로 들어가니 인도계 직원이 반겨주었다. 아이가 입을 만한 것들을 여럿 보여주었는데, 문에 걸린 하늘색 후드티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걸로 달라고 했다. 얼른 입자, 했는데 주춤주춤 하는 녀석. 직원은 그의 마음을 함께 눈치채고 탈의실로 안내해 주었다. 웃으며 작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환복한 아들이 나왔다. 금액을 물어보기 전이라 터무니없는 금액일까 걱정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 있음에 감사하며. 다시 신나게 거리로 나섰다.
한낮의 소동으로 더욱 출출해졌다. 새벽에, 옆 방 청년들에게 하몽과 메론을 받으면서 근처에 큰 시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앞에 요트가 놓인 화려한 레스토랑 거리를 지나 비슷하게 생긴 골목을 한참 걸었다. 에너지가 10%밖에 안 남았다며 칭얼거리는 녀석을 달래며 도착한 시장. 보케리아 시장에는 다양한 국적과 외모의 관광객과 상인들로 분주했다. 우선 제일 앞에 있는 가게에서 치킨과 감자칩을 사서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다. 식당 앞 의자에 앉아 먹는 이들과 우리가 문득 대비되어 마음이 살짝 초라해질 때쯤, 독서모임의 K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저흰 예산이 넉넉지 않아서 최대한 저렴한 걸로, 무조건 가성비로 숙소 예약하고 일정 짰어요."
살짝 위축되어 말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그게 진짜 여행이죠. 그런 여행이 기억에 더 오래 남고요. 아들한테도 정말 좋은 추억이 될거예요"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복이다. 그들이 해준 말과 심어준 용기들이 먼 이곳까지 와서 나를 도운다.
이어 과일컵과 이름 모를 빵도 먹고 몸도 맘도 불렀다. 복작거리는 시장, 파는 건 달라도 시장은 언제나 에너지가 넘친다. 구석구석 여러 풍경을 담고 숙소로 향했다.
그날 저녁, 아들은 밤에 빛나는 십 이각 별을 보고 싶다 말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밤은 위험할 것 같은데. 걱정도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또 올지 모르니까.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는 여러 번 다녀 익숙해진 길을 걷고 걷다가 마침내 멈춰 섰다.
밤이 되니 또 다른 모습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높은 기둥들, 오른쪽에서 가장 빛나는 별 하나.
아들이 건네준 망원경으로 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엄마 진짜 예쁘지? 오길 잘했지?"
마지막 하루는 그렇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