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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Jan 15. 2020

에세이집은 ‘아무나 내는 책’ 인가?



  - 이게 무슨 책이라고

  - 이런 건 쓰레기...라고 봐야죠. 활자 쓰레기.

  - 이렇게 아무나 책 내도 되는 거야.     



   작가와 일반인의 경계에 있는 ‘일반인 작가’의 에세이집에 대해서, 가끔 혹은 자주 듣게 되는 비판이다. 에휴... 책. 누가 내고, 누가 읽는가.     



   내게, 위대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손톱만큼도 없었다고는 할 수는 없다. 저기 저어 멀리 아득한 곳에 박경리, 박완서, 한강 작가가 계신다면. 상대적으로 가까이에 공지영... 혹은 정이현... 작가가... 계신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금부터라도 뼈를 깎는 노력에 노력을 한다면 5년 후에는 7년 후에는 가까이에 있는 저 작가들의 작품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를 꿈꾼 적이 있었다. 물론,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던 때에나 할 수 있었던 허상이었음을. ‘브런치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글을 올리자’는 스스로 정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글을 써 나가면서,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종자’였는지를. 글쓰기의 고단함과 막막함을 쓰면 쓸스록 알게 되는 나는, ‘나는 안 돼’ 라며 스스로 고개를 가로저은 적이 수 백 번이다.      



  작년 여름. ‘1년 정도 글을 쓰고 책을 내야지’했던 비장한 나의 각오는 이제 시나브로 사라졌고. 쓸수록 글감이 줄어드는 현실에, ‘글감 찾아 삼만리’ 여행이라도 가야 하나... 싶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무엇이라도 좋으니 쓰고자 한다. 재밌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내 부족한 글들이 책으로 묶이기를 간절하게 바람 한다. 당연히. 여전히. 아마도 계속. 바람 할 것이다.     

  그런데, 저런 말들을 들으면 나는 가슴이 베인다. 세상에 나올지도 안 나올지도 모르는 나의 책은 이미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때,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시청률 60%를 넘긴 시대가 있었다. 10명 중 6명은 주말 저녁 8시에 해당 드라마를 본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당시는 방송 3사를 제외하곤 미디어 콘텐츠를 접할 방법이 없던 시대였다. 요즘은 TV라는 미디어 매체만 해도, 지상파, 종편, 케이블 등의 수많은 채널이 존재한다. 사실, 이제 TV는 ‘어른’들이나 보는 것이지, 10대 20대 등의 젊은 층은 TV 자체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 사람들은 유튜브나 방송사의 다시 보기 등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다른’ 것을 보는 시대다. 자신이 선호하는 채널이 있는 경우 - 그것이 더 레어 하고 대중적이지 않다면 - 훨씬 더 있어 보이는 ‘취향’이라고 존중받기도 한다. 이제는 새롭고 재밌는 것을 스스로 알아서 ‘발굴’하는 시대다.     



  책 읽기는 어떤가. 책의 경우는 아직도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의 책이 출판 점유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시장이라고 한다. ‘베스트셀러 정도는 읽어줘야, 식자의 완성’으로 인식되는 걸까. 책의 경우는 아직은 ‘발굴’의 대상이 아니다. 남들이 공인한 책 목록(베스트셀러)을 ‘제공’ 받는다. 일단 활자는 능동적으로 ‘읽어야’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매우 고단하다. 책을 손에 집어 들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의 피곤함과 맞서야 한다. 무려 중력을 이겨내고 일단 책상까지는 무리더라도, 소파에라도 앉아야 한다. 역시나, 피곤하다. 또한 책은, 미디어에 비해서 접근성이 좋지 않다. 책은, 유튜브, 혹은 포털의 다시 보기처럼 바로바로 볼 수가 없다. 요즘은 원하는 책을 볼 수 있는 ‘밀리의 서재’ 등의 플랫폼을 통해서, 책도 ‘소유’보다는 ‘소비’하는 시대가 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책이 미디어에 비해서 대중적 문화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책 읽기 시장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요즘은 모두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지는 않는다. 97학번인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만 해도, 모두가 당시 유행하던 책을 읽어야만 ‘지식인’으로 가는 배를 탔다는 동지의식 같은 것을 느끼던 시대였으니. 나는 최근에 ‘이슬아 수필집’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나에겐 정말 재밌는 수필집이었다. ‘이슬아처럼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며, 그녀가 쓴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았었다. 나에게는 존경함에 부족함이 없는 이슬아 작가가, 다른 이에게도 그러할까. 나는 ‘이슬아 수필집’을 다른 이에게 ‘강추’할 수 있을까. 이제는 책도 선풍적인 인기보다, 소수에게 지지를 받는 그런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작가가 되어주길 바람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각자 어떤 세상에서 어떤 공기를 마시고 사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대한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인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p.28     




  아무리 행간을 늘리고, 자간을 조정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중간중간 삽화를 끼워 넣어 쪽수를 늘린 책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150쪽 정도 되는 얇은 책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A4 용지로 치면, 30장은 쓴 내용일 것이다.

  A4 30장, 그 작가는 쓴 것이다.

  나는 안 한, 혹은 못한 것. 

  그 어려운 일을! 그 작가는 해낸 것이다. 


  세상에 출판된 모든 책, 쓰레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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