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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Feb 13. 2020

취업보다 백만스물한배 어려웠던 40대 재취업

              

  

   나의 쌍둥이 아들들, 4세. 드디어, 이 꼬맹이들이 어린이집에 갔다. 나는 어린이집 엄마들을 사귀어, 헛헛한 독박 육아에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하는 원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허나 나는, 어린이집 엄마들 사이에서 왕좌에 앉아있었던 그녀를 몰라봤고, 그녀의 OO엄마 은따(은근 따돌림) 유발에 반대했고, 그리하여 나도 세트로 ‘은따’가 되었다. 아웃사이더... 는 다소 고독하고 외롭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나’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기에(아무도 놀자고 안 하기에), 당시의 나는 나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심심했다)     


  ‘에라이, 잘 됐다. 일자리나 찾아보자-’     


  아이들이 등원한 오전 10시, 나는 잡코리아, 인크루트 등의 취업사이트를 뒤졌다. ‘취업할 수 있을까...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데...’ 나는 장장 공백기 5년의 경력단절녀다. 눈높이...? 그것을 낮춘다는 말은 내겐 너무나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그런 것은 이미 어떤 것을 가진 자나 취할 수 있는, 다소 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선택적 태도일 뿐. 당시의 나는 내 눈이 어느 정도 높이에 달려있는지, 가늠 조자 할 수가 없었다. 개발언어와 소프트웨어가 자주 바뀌는 이 IT 바닥에서는 6개월만 일을 쉬어도 도태되기 십상인데, 나는 5년이나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다루었던 개발 언어를 사용하는 곳이 아직은 있으니, 경력으로 밀어붙여보자. 집 근처인 수원이나 판교 쪽 중소 개발업체에 이력서를 넣을만한 곳이 몇 군데 보였다.      


   근데 잠깐만...! 어렵사리 붙었다고 치더라도. 9시 출근 6시 퇴근...?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쌍둥이 등-하원 도우미를 채용하여 육아에의 부담을 던다 하더라도. 4세, 아기와 어린이 중간단계의 이 어린 존재들을 감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엄마인 나의 몫이었다. 그 해가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간 첫 해여서인지, 4세 아이들은 3세 때보다 훨씬 더 자주 아팠다. 쌍둥이 아들들은 번갈아가며 잦은 감기, 장염, 수족구, 폐렴 등으로 앓기가 일수였다. 한 달에도 절반은 어린이집에 등원을 못 하곤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울고 불고 안기고 바닥에 드러누우며, 자신들을 사랑으로 보살펴주기를 온몸으로 바람 했다.   

  

   그렇지... 못하겠지... 접자 접어. 채용사이트는 보지도 말자. 애들은 차치하고, 나의 체력은 또 어떤가. 쌍둥이를 낳고 키워온 만 3년의 시간을 버텨온 나의 체력이 하루 8시간의 노동과 육아를 동시에 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 녀석 열 감기 3박 4일 치르고 나면, 그다음 녀석 열 감기 3박 4일 치르고. 그렇게 아이들 케어에 일주일을 비몽사몽 보내다 보면, 여지없이 나도 몸살감기를 앓곤 했다. 바닥인 체력이 회복되기도 전에, 이렇게 일자리를 알아보는 내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서 이렇게 세월만 보내면, 나의 경력단절은 6년... 7년... 늘어날 것이고. 이러다가는 정말로 사회로의 진출은 꿈도 못 꾸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긴장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제2의 커리어를 찾아야 했다. 경력을 살리는 것도 좋지만, 안 된다면 우회하여 다른 길로 가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다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식의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 시장에 편입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단한 몸과 마음을 애써 달래 가며 다시 일을 시작하는데, 남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직업. ‘우와, 언니 숨은 능력자였네.’ 정도의 감탄사와 부러움을 자아낼 수 있는 그런,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을 구하고 싶었다. 허락된다면 얼마간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라도 말이다.     


   주저주저하다가, 상담사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상담사... 그거... 되려면 힘들... 지?”

   “음... 힘들지. 너 내가 자주 이 바닥 이야기해 줘서 조금은 알잖아. 일단, 이 바닥도 지금 서울대니 뭐니 고학력 인력 풀이 넘쳐나요. 그리고 넌 공대 나왔잖아. 일단 학부 기초가 안 맞을 텐데. 대학원 잘 알아보고. 아마... 사립대학원 한 학기 학비가 400(만원) 넘을 걸. 그게 5학기인가 그래. 그리고 그렇게 투자해서 상담사가 바로 된다는 보장도 없고. 돼도 초봉이 엄청 박해... 투자 대비 본전이 나오려면 경력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흠... 한 번 잘 생각해봐. 일단 나는 글쎄...”     


   그렇구나. 쩝.

   아줌마들한테 돈 벌어오라고 하면, ‘쇼핑몰 차리겠다’ 아니면 ‘상담사 되겠다’고 한다는데. 그래, 이것도 아니구나. 막막하다. 하지만, 이것은 20대 백수 시절에 경험했던 막막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땐, ‘언젠가는’ 뭐가 돼도 될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이 있었고. 잠시 아르바이트 등을 하더라도 그 아르바이트가 내 직업이 되리라고는 여기진 않았던 시절이다. 재고 따지기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고 인생체험이 되겠다 싶으면 ‘한 번 해 볼까’하며 덤벼 볼 수가 있었다. 그땐 젊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싯물에서 멸치가 뜰채로 걸러지듯이, 취업이라는 바다에서 ‘나이 제한’이라는 뜰채로 걸러짐을 당한다. ‘구인 조건:40세 이하’라는 문구를 보게 되는 순간 나는, 여지없이 움찔한다. ‘아... 나 여기에 포함되는구나’ 결혼하고 애 낳고 키워왔을 뿐인데...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나의 시간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나만 기억하는 나의 사회적 나이는 ‘35세 OO회사 과장’으로 선명히 남아있었으나, 남들이 보는 나의 물리적 나이는 41세 쌍둥이 엄마로 읽히고 있었다.     


  ‘저 엄청 일 잘해요. 진짜예요. 그리고 남들한테 제 나이 말하면 다 놀래요. 어므나, 증명사진 한 번 보세요. 30대로 보이잖아요.’라고 말할 기회도 없이, ‘스읍-, 아주머니, 이 구역에 덤비지 말고 가세요’라고 해당 회사의 취업담당자가, 사회가, 세상이 내게 손을 휘휘 내어젓는 것만 같았다. 이게 다 결혼 늦게 하고, 애 늦게 낳은 내 탓 이지모... 그렇게 자책했다. 어느 구역에 어떻게 발을 들여다 놓아야 할지도 모른 채, 내가 구하는 직업의 조건은 3가지로 정리만 되어가고 있었다.     

  - 아이들 어린이집 간 사이에‘만’ 할 수 있는 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 나이 40세 이상도 할 수 있는 일

  - 전공을 살리면 좋음





  그렇게 ‘뭘 해야 하나’를 고민하며 하루에도 여러 번 인터넷을 뒤적뒤적 뒤지다가, 연예기사로 빠지기가 일수였던 어느 날. 인터넷 기사광고 링크를 따라가다 보게 된 직업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 이게 뭐 하는 직업인가? 초등학교 정규 수업 이후에, 전문 강사가 학교에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특정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다. 코딩....? 코딩 과정을 초등학교 5학년부터 배우게 된다는데. 아직 누가 어떻게 가르칠지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없다고 한다. 다만 방과후 수업에 코딩 과목 강사를 많이 모집한다는데, 그래. 이 직업을 하면 좋겠다. 위의 3가지 조건에 흡족하게 만족한다. 다만,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지 나에겐 정보가 전무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설이지만 초등학교 방과후강사 2급 자격증도 주고, 코딩 강사 자격증도 주고, 이력서 작성도 도와주고, 면접 노하우도 전해주고, 1학기 2학기 합 48차시 수업 계획서도 제공해 준다고 했다. 나는 해당 사이트에 정확하게 139만원을 남편의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온라인으로 코딩 방과후강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이트에서 도와주는 것은 딱 거기까지. 취업 시즌이 되자, 해당 사이트의 문의센터로 전화 연결도 하기가 어려웠다. 자격증을 주었으니, 취업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뭔가 ‘당했다’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이력서 제출을 미룰 수는 없었다.      


   11월부터 각 초등학교에서 나오는 방과후강사 모집 공고를 찾아보고 이력서를 제출해야 했다. 화성, 오산, 수원, 용인 등에 위치한 거의 모든 초등학교의 모집공고를 확인했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의 출퇴근 거리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족히 30군데 즈음되는 듯하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면접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12월이 되었다. 그리고 해를 넘겨 1월이 되었다. 1월이면 각 학교마다 방과후강사 모집이 완료되곤 한다.


   ‘정교사 자격증 소지 여부’

    ‘방과후 강사 경력만 기재’     


   ‘없음’, ‘없음’. 이 단어를 이력서의 하얀 빈칸에 입력할 때마다, 나는 나 스스로 ‘자격미달’, ‘불합격’을 입력하는 것만 같았다. 정교사 자격증...? 교육대학교나 사범대학교 나와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학교 수업 실습 나가고 해야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건 뭐, 따려야 딸 수도 없는 자격증이고. 방과후 강사 경력...? 당연히 없지... 사실, 남을 가르쳐본 경험이라곤, 대학생 시절에 중학생들 과외한 것이 전부다. 그래... 내가 학교 측이라고 해도 경력도 전무한 나를 뽑겠어. 더더군다나, 아이들 다루는 데는 노하우가 필요한데. 나를 뭘 보고 뽑아주겠어. 요즘 이 강사 자리도 인력풀이 넘쳐난다고 했다. 오죽하면, 미술, 바이올린 등의 예능 과목 같은 경우에는 해외 유학파 출신들도 꽤 있다고 하던데... 근데... 내 돈 139만원... 인생 경험했다 치더라도... 그 돈이면, 애들 옷을 사면 100개를 사고도 남고... 나 피자 시켜 먹을까 말까 하다가 라면 먹곤 했는데... 남편 보기도 민망하고. 나는 홀로 자아비판과 자기 합리화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레베카 선생님 맞으시죠? 내일 면접일인데,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예에...? 네네. 내일 됩니다.”     


   내일? 선생님? 아 맞다. 선생님이지. 부랴부랴 면접을 준비했다. 다음날, 학교 교무실에 도착.


   “무슨 일로 오셨나요?”

   “저... 코딩 면접 보러 왔는데요”

   “코딩이요...? 제가 아직 연락을 못 받아서요. 저기 좀 앉아계시겠습니까?”

   학교 관계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 못 찾아온 걸까. 이 학교가 아닌가. 떨지 말자. 머릿속으로 할 말을 다시 정리하자.     


   “코딩 면접 선생님, 따라오세요.”

   면접실로 들어가니, 교감선생님, 방과후 부장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 대표가 계셨다. 준비해 간 코딩 교육용 보드게임 시연, 코딩 시연, 코딩으로 움직이는 로봇 시연, 그리고 경력자랑 등등. 15분의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운전하며 집으로 오는 동안, 멍...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나지 않았고. 웃음이 날 거 같았는데 웃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잠깐 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어린이집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다음 날, 오후에 문자가 왔다.

   “레베카 선생님, 합격하셨습니다. O월 O일 계약서 쓰러 오십시요”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합격했던 코딩 선생님께서 개인 사정으로 고사를 하셨고. 차점자 선생님도 고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면접을 보게 된 거라고. 어떤 사정이었든, 나는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 엄마 나 붙었어. 엄마... 저기... 그래서 말인데... 나... 첫 수업 하는 그 주간에 엄마가 우리집에 좀 와 주면 안 될까... 그냥... 엄마가 옆에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내가 무슨 도움이 되나...”

   “엄마는 무슨... 도움이 되지! 그냥 옆에만 있어도 도움이 되지. 엄마 3월 첫째 주에 올 수 있지... 요...?”


   당시 내 나이가 41세였구나. 그때도 내겐 엄마가 필요했다. 나는 엄마가 해 준 따뜻하고 하얀 밥이,  먹고 싶었다. 아니, 엄마랑 마주 앉아서 밥이 먹고 싶었다. 혼자서 육아를 버티기 위해서 부엌에 선 채로 꾸역꾸역 밀어 넣듯이 먹는 그런 밥 말고. 엄마랑 상 차려놓고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며, 그렇게 밥이 먹고 싶었다. 엄마랑 그 밥을 먹고 ‘첫 출근’을 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 방과후강사 체험기

- 방과후강사 고사기

로 이어집니다.


전 현재 전업주부구요.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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