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베카 Feb 20. 2020

우리가 그때까지 만난다면.

 

  독서모임에 예비 고3 엄마가 있다. 그녀와 예비 고3의 학습량, 아이가 느끼는 중압감, 그리고 매년 바뀌는 입시 제도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레베카, 자기 애들 대학 갈 때쯤이면 또 달라져 있을 거야. 그땐, 또 저출산이다 뭐다 입시생 수도 줄어들어 있을 거고. 해 매다 입시 전략이 바뀌니까 뭐. 레베카, 우리가 그때까지 만난다면, 그때 이런 고민했었다며 추억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치?”     


  ‘우리가 그때까지 만난다면’. 이라는 전제.    

 

  ‘에에... 왜 그러세요. 우리 그때까지 만나야죠.’라는 말이, 이 말이 뭐라고. 내 목에서 내쳐 나오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생각했다. 나의 아이들이 고3이 되려면, 십 수년이 남았고. 내가 그 십수 년 동안 이 독서모임에 그리고 그녀에게 한결같은 마음일지. 나는 내 마음을 보장할 수 없기에. 십수 년 후면 거짓말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의 진심을. 지금 진심이라는 이유만으로 훅-하고 고스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이 지키지 못할 ‘영원’을 뻐꾸기 날리 듯, 날려왔던가. 많이 사랑했던 그‘들’에게. 그리고 나와 놀아달라고 졸라댔던 그녀‘들’에게. 그렇게 바뀌어온 내 마음의 지난한 이력을 알기에, 이제는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만약에,

  “에에... 왜 그러세요. 우리 그때까지 만나야죠.” 

  라는 말이, 경박하기 그지없는 내 입에서 훅- 하고 내어밷어졌다 할지라도. 그녀는, 이내 철없는 아줌마의 어리숙한 순정이라 여기며, ‘그래.’라고 간단하게 말하며, 나의 말을 삼켰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말하는 아줌마 경력 20여 년의 그녀. 

  ‘이 언니는 2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아줌마들을 만나고 헤어지셨을까.’






  ‘시절 인연.’

  나는 이 단어를 애증한다.     

  붙잡을 수 없는 인연에 대해서, 그 시절 그 사람과 잘 보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그 인연을 이제는 보내주라고 나를 설득해야 할 때, 이만한 단어가 없기에 나는 이 단어를 ‘애’하지만. 그 관계에 좀 더 노력하지 않은, 내 진실되지 않은 나만 아는 나의 그 계산된 여력 없음을, ‘우리의 시절이 끝났다’고 이 단어 뒤에 숨길 수 있기에, 나는 이 단어를 ‘증’한다.     


  나이가 들면, 담담해진다.

  담담해져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말은 아프네.


매거진의 이전글 취업보다 백만스물한배 어려웠던 40대 재취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