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이야기] 여행의 쓸모

그 순간순간의 벅차오름을 기록하기를

by Scarlet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정확히는 여행이 주는 '불명확함'을 어려워했다. 응당 여행은 불편함과의 싸움이다. 불편한 침대, 불편한 거리, 불편한 언어. 그 불편함이 주는 이색적인 감각이 여행을 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평안함을 좋아한다. 안온한 지금을 좋아한다. 잠은 늘 자는 익숙한 방에서, 익숙한 거리를 걸으며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풍경에 빠져들고, 익숙한 언어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지금.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진실로 '여행의 쓸모'를 알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행을 하나의 지적 자극으로 생각했다. 성당을 가고, 박물관을 가고, 미술관을 가야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를 미리 공부하고, 루트를 미리 짜서 가는 것만큼 완벽한 여행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노력들' 이 여행을 값지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니 여행은 내게 항상 힘든 것이었고, 어려운 것이었으며, 도통 쓸모를 알지 못하는 무언가였다. 약간 여행을 노동처럼 다닌 것도 같다.


이 책에서 나오는 여행은 순간적이고, 단편적이다. 길을 가다 지나칠 법한 하나의 풍경들이 모여모여 멋진 기록이 되고 글로 남는다. 신기하다. 내가 생각한 여행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모든 미술품을 감상한다던지 파리 국립 미술관을 본다던지 파리의 역사적 지구들을 돌아본다던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엄청난 감상 대신, 길을 지나치다가 우연찮게 나도 마주칠 법한 일상들의 사진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생각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나는 저 풍경을 보며 과연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같은 생각일까 다른 생각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왜냐면 나는... 저 풍경을 볼 여유도 없었을 것 같아서이다. 내 계획에 따르면(물론 내 MBTI는 P이지만) 저런 풍경에 시선을 붙들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빡빡하고 어렵게 계획을 짰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 계획을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나에게는 보이지 않을 풍경들이, 이 책에는 잔뜩 보인다. 그게 부럽고, 또 부러워서 여행을 문득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여행을 간다고 해도, 내 버릇을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루지 못할 계획을 잔뜩 짜두고,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죽도록 움직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사이에 조금 틈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술관 대신 미술관 입구, 문득 본 바다나 강의 움직임,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 일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니, 그 다른 곳에서의 관찰자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어쩐지 내가 꽤 그럴듯한 작가가 된 듯해, 기분이 좋다.


어느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 때, 가끔 그 풍경과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함께 내 시선에 넣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마저 내 시선 속에 가둘 수 있을 때, 그 때 나는 진정으로 그 풍경을 다시 즐기고 싶어질 것 같다. 보고 잊혀질까 봐 사진으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아 이 풍경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어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리고 함께 한 사람들을 기억에 남겨두고 싶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좋다. 다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조그만 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나는 내 앞 뿐 아니라, 내 옆과 내 등 뒤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여행은 정말 쓸모있는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