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차와 함께하는 명상

조용히, 그 행위에만 집중하며, '지금'을 느끼는 것

by Scarlet

나는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사랑하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사랑했다. 정확히는 이 세계가 아닌 세계를 상상했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를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세계를 가득 안고, 내가 사랑하는 세계에 가득 묻혀 지낼 수 있었다. 자다 일어나서는 최애의 이름을 불렀고, 자기 전에는 차애의 이름을 부르며 잠들었다. 흠뻑 다른 세계에 빠져 지내는 것 이외의 삶은 생각하기 어려웟다. 현실은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짜증이 난다.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은 그 세계였다.


하지만 점차 그런 사랑은 바뀌어갔다. 사랑은 빠르게 타오른 만큼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식었고, 남은 자리에는 재도 남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나 사랑하던 것들이 어느새 무감한 '남의 일'이 되어버린 사실이 안타까웠다. 동시에 이런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이 사랑에 허무함을 느꼈다. 재도 남지 않는 사랑, 감정의 찌꺼기도 남지 않는 불사오름.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좀 지치게 했던 것도 같다. 열정적인 사랑은 그 열정만큼 내 체력도 삼켜버린 것 같다.


그래서 차에 빠졌을 때, 나는 그 불타오름을 걱정했다. 이번 사랑도 그렇게 불타올라서, 재도 남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나는 어른이었다. 나는 두근거림을 꾸준히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 어른이었다. 지나치게 불타오르지 않도록 불 조절이 가능한 어른이었다. 물론 이런 조절은 내 체력이 예전같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큰 도움을 준 건 역시 명상이다. 물론 나는 이것을 명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명상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명상은 내게 지나치게 난해한 개념이다. 잠들지 않는 잠, 한없이 망연한 세계와 비슷하다.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같다. 그런... 세계는 어쩐지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명상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차 수업에서 명상 이야기가 나오면 느낌이 달라진다. 차와 함께하는 명상, 그러니까 차를 즐기며 명상할 수 있다는 내용은 내게 충격이었다. 차를 마시는 건 감각적인데, 그걸 감각을 차단해야 하는 명상과 연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동시에 나는 행다를 배웠다. 차 우림법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정확히는 한국 차를 내리는 '특정한' 방법이었다. 이건 다관별로도 방법이 다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교수님의 스타일로 배웠다. 이렇게 마셔도 좋고 저렇게 마셔도 좋은 게 차라지만, '행다' 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순간 어쩐지 등에 힘이 들어가고 각이 살아난다. 숙우를 데우고 찻잎을 넣고 차를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 알고 있어!'라는 기분이 들어 다급히 차만 우려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의식적으로 여유와 멈춤을 두고 행다를 하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행다 자체가 하나의 명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느린 속도로 숙우를 데우고 찻잔을 데우며 찻잎을 넣고 물을 붓는 이 하나의 과정 속에서, 이 과정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머릿속을 비울 수 있었다. 신기했다. 좋아하는 것을 앞에 두고서도, 차분해질 수 있다.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느긋하게 손을 움직일 수 있다. 손과 입이 찻물에 적셔지는데, 정작 머릿속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새하얘지는 그 감각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때쯤 되어, 좋아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불태우기보다 서서히 적시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 행다는 내게 너무도 소중하다. 행다의 시간은 조용하다. 예전에는 음악이나 애니메이션을 배경음처럼 틀어놓기도 했는데, 그런 소리들은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해 줄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떠한 소리로도 내 귀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나는 조용한 세계에서 조용히 나만 아는 차맛을 음미한다. 오로지 나만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


'지금' 이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