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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 Jun 11. 2024

[옛날 이야기] 일기, 숙제일까 기쁨일까

옛날엔 시켜도 안 했던 걸, 요즘은 시키지 않아도 잘 해요!

 어린 시절, 일기가 숙제이던 시절이 있었다. 방학 중 일기 쓰기는 모두가 해야 하는 숙제였고, 모두가 힘들어하는 숙제였다. 특히 날씨 칸이 제일 쓰기 어려웠는데, 지금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 그 당시엔 매일 날씨를 꾸며서 적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그 나이 대 어린아이가 매일 뭘 쓸 게 있단 말인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중학생 때, 한 달 반치 일기를 이틀만에 몰아썼던 나쁜 학생이었을 텐데.


 하지만 일기쓰기라고 하면 떠오르는 내 습관 같은 것이 있다.  어린 시절 버릇 중 하나이다. 내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 보이는 것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적어나가는 것이다. 이게 지금의 글쓰기에 꽤나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삼십 분을 넘게 걸어야 하는 학교 가는 길이 너무너무 싫었다. 마을의 언니 오빠들은 벌써 학교를 다 간 뒤였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다니기엔 너무 잠이 많았다. 그리하여 느릿하게 일어나 느릿하게 준비를 하고 밖을 나서면, 까마득한 길이 이어졌다.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하릴없이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나는 생각이 많았다. 그 많은 생각을 적기에는 글 쓰는 속도가 느렸다.(아무래도 아직 손이 덜 발달되었을테니) 하지만 그리기에는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나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문장을 만들었다.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식이었다.


해가 떴다. 덥다. 더운데 나는 걸어간다. 엄마가 학교를 가라고 했다. 나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그냥 끊어 달라고 했다. 엄마는 학교를 어떻게 끊냐고, 그건 안 된다고 했다. 어, 저기 파란 꽃이 있다. 저 꽃은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어서 좋다. 저기 멀리에 달린 노란 꽃은 먹어도 된다. 꿀꽃이다. (어린 시절, 개불알꽃을 저렇게 불렀다.)저건 뱀딸기꽃이다. 뱀딸기는 먹으면 안 된다고 빠들이 그랬다. 빠들은 바보다. 그런데 자전거를 잘 탄다. 나도 자전거를 잘 타고 싶다.


어린 아이의 문장치고는 제법 긴 것 같기도 하다. 심했지만 할 게 없던 시절, 나는 열심히 머릿속으로 일기를 썼다. 지만 정작 일기 쓰기 숙제는 힘들었다. 머릿속으로 쓴 문장들은 정작 저녁만 되면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그 때 휴대폰 같은 것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그 긴 시간동안 아주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수많은 생각들은 이후에 나를 만드는 하나의 틀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들은 끝없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일상의 기록을 허투로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했던 생각 중 일부는 아주 멋진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행복한 추억이 될지 몰랐을 것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져버린 아쉬움이 뒤늦게 내게 다가온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있기에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 놀랍지만, 나는 밴드에 매일 내 일기를 올리고 있다. 내 일상과, 그 생각들을.


내 일기를 죽 훑어내려가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나'의 모습이다. 과거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의 내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건 꽤 신기한 경험이다. 과거의 나는 화를 내고, 울고불고, 짜증이 차 있고, 때로는 신나 있다. 아주 먼 거리에서 그 글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너 왜 그러니?' 라고 묻고 싶을 정도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일기를 쓰는 게 아닐까 싶다.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싶어서. 기록으로 남겨진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나를 이해할 수 있기에.


여전히 내가 바보같은 실수를 하고, 사소한 일에 울고불고 하더라도 미래에서 본 그 상황은 별 것 아니라서 내 눈에 띄지도 못할지 모른다. 그런 상상으로 지금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일상. 하지만 나의 한 부분을 이룰 일상. 그렇기에 일상을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 일상의 기록 또한 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적는 나 자신이 뿌듯하다.

옛날에, 마음 속으로만 일기를 적을 수 있던 아이가 있었다.

일기를 믿지 못하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자라서, 아주 멋지게 일기를 쓰는 어른이 되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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