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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 Jan 20. 2024

[옛날 이야기] 내 맘 속 컬러감 생생한 TV의 추억

내 색감 가득한 기억 속 오로지 흑백인 TV

 내가 기억하기로는, 적어도 다섯 살 이후부터 우리 집에는 흑백 TV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집은 작은 구멍가게를 운했고, 구멍가게 안방에 있던 TV가 그랬다. 위의 딱, 딱, 딱 하는 소리가 나는 손잡이를 돌려서 채널을 고정하고, 아래의 찌르르르륵 돌리는 손잡이로 주파수를 맞춘 것 같다. 소리가 그렇게나 달랐다.


 내 나이대에 흑백TV를 봤다고 하면 다들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TV를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쓴 것으로 기억한다. 귀찮은 일을 맡기 싫어 도망다니는 나를 붙잡고 동네 할머니는 엄마가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 엄마는 이미 논에 있을 것이다- '쇳대'(열쇠)를 내게 주었다. 그걸로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받는다. 숙제를 하고 혹은 온갖 남아도는 박스떼기에 그림을 그리고, 흑백TV로 만화를 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걸로 디즈니 만화동산과 아침마다 하던 해외 여행 프로그램을 보았다. 흑백이었는데도 너무 재미있어서, 신나게 본 기억이 있다. 그 때는 가게에서 살던 때였다. 작은 방과 큰 방이 있었고, 큰 방에 놓인 TV는 작고 지직거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촌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바로 그 TV가 보여주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동네는 작았고, 마을 사람들은 오손도손 살았다. 여름만 되면 동네 큰 사거리에 모두가 모여앉았다. 사거리 근처 집에서 전깃줄을 이리저리 끌어다 와서, TV를 꺼내놓고 어른들은 연속극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TV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사람들은 TV소리가 묻힐 만큼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렇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 TV는 이곳이 사랑방임을 상기시켜주는 물건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놀았는데, 더위가 한 풀 꺾일 무렵쯤 되면 다들 모여 곤봉 연습이나 달리기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네별 학생 수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을 때였다. 4개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지역별로 동군, 서군, 백군, 남군으로 나누어 운동회를 했다. 나는... 동군이었다. 그 때의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준비에서 다 제외되었으나, 초등학교 2학년부터 하는 곤봉체조에는 참여해야 했다. 언니오빠는 곤봉체조 순서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 옆에서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하며 배웠다.


요즘도 곤봉을 하려나? 내가 전학간 학교에선 곤봉이 없었으니, 학교마다 다 다를지도 모르겠다. 플라스틱으로 된 가벼운 곤봉에 모래, 팥, 콩, 쌀 등을 넣어 무게를 맞추었는데, 무엇을 넣었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랐던 기억이 난다.  언니, 오빠와 놀다가 TV앞에서 드라마를 보는지 수다를 떠는지 모를 엄마 품에 안겨 잠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내가 5학년때 이사한 집은 마당과 헛간이 있는 옛날 농촌 집이었는데, 서향으로 전면에 문이 가득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컬러TV가 있었다. 컬러 TV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물건이었다. 나는 온갖 만화 노래들을 외워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여름 해질녘이면 방 안 끝까지 햇볕이 들어오곤 해서, 여름 낮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우리 집 국룰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대에 TV에서 드래곤볼이 방영되었고... 오빠와 나는 그 더운 여름날, 뒤통수에 연기가 날 만큼 햇볕을 맞아가며, 손오공이 드래곤볼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일대기를 구경했다. 만화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이던 시절이다.

 

컬러 TV가 내 세상에 들어온 뒤에도 2년 정도는 흑백 TV가 살아남았다. 어느 순간, 우리 집이 구멍가게를 그만두었고 그 뒤부터는 그 흑백 TV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 TV가 보여준 흑백  세계만은 선명한 컬러감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따닥따닥 돌리는 그 손맛과 함께.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까지도 그 TV를 기억하고 있다.


그 조그만 흑백의 세계가 얼마나 찬란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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