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잔인한 성탄절
*
내 몸은 두 팔이 묶인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자가 책상 건너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손님 대접하는 솜씨가 후하군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여자는 간결한 미소로 답했다.
“우리 통성명하죠. 절 이제부턴 정원장이라 부르세요. 당신을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협조만 잘 해 준다면.”
정원장은 가슴께에 품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 위로 올렸다.
서류철 표지엔 [2008년~2015년]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한참 넘기더니 한 페이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보이시죠? 최진수씨 사인.”
노란 갱지 위에 깨알만 한 글씨가 빼곡히 채워진 계약서였다.
마지막 단락엔 심지어 빨간 줄이 그어 있었다.
[최진수(을)은 경품 수령 후 계약일로부터 10년 후 상품을 반납한다.]
그 아래엔 내 사인이 보란듯이 휘갈겨있었다.
분명 흥분 상태였던 나머지 계약서 조항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용어가 빼곡한
여섯 페이지 계약서를 그 자리에서 모두 이해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이다.
정원장은 가소롭다는 듯 윗입술을 일그러트리곤
등뒤 벽을 향해 리모컨을 눌렀다.
롤스크린이 벽을 가득 채울 만큼 내려왔다.
“기억이 나지 않다고요? 여기를 보세요.”
젊은 밤송이가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시선을 스크린으로 고정시켰다.
눈을 감아 볼까 싶었지만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부딪혀야 했다.
스크린에선 푸른 화면이 떠오르더니 그것은
넓고 깊은 파도가 되어 밀려 들어왔다.
조금씩 점차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파도는 화면 밖으로 솟구쳐 밀려들어왔다.
그리곤 검푸른 소용돌이로 돌변했다.
속으론 ‘이건 가짜야 속지 마.’ 주문했지만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의자 난간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검은 구멍이 이미 나를 잠식해버렸으니까.
내가 소리도 형체도 없는 암흑 어딘가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갑자기 섬광처럼 번쩍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
2010년 12월 24일 성탄절 이브.
순수했던 내 사랑이 더러운 배신으로 짓밟힌 다음날이었다.
상점들은 저마다 알전구를 달았고 거리엔 캐롤송이 울려 퍼졌다.
그러선지 늦은 저녁임에도 도시는 한낮처럼 포근했다.
W백화점을 찾은 시각은 오후 여섯 시 반.
건물 정면엔 문구가 전면을 감싸고 있었다.
[2010 대국민 소망 프로젝트
모여라! 당신의 10년을 위해!]
사람들은 홀린 듯 백화점 주변으로 모였다.
그러나 군중속은 춥고 외로웠다.
보푸라기가 무성한 내 카멜 자켓은 낡았고,
고동색 정장팬츠 바짓단은 걸을 때 마다 실밥이 드러나 있었다.
선인장 가시처럼 돋아난 수염은 뺨에 가득했고,
거무죽죽한 피부와 쳐진 입 꼬리가 현내상태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난 그저 루저다.
사람들은 앞다퉈 로비로 몰려들었지만 이미 만원 된 상황.
일부는 백화점 앞 전광판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로비에선 걸 그룹의 축하공연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화물차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렸을 때,
1층 무대에선 공연이 한참 진행중이었다.
로비 절반을 차지하는 무대 위로 걸 그룹들은 아찔한 공연을 펼치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방금전 화물 엘리베이터에서 본 냉동 고등어처럼
줄 맞춰 포개져 있었다.
그 모습은 때론 공포스러웠다.
W백화점은 방송국과 연계하여 성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백화점 물건 5만원 이상을 구입하면 소망 프로젝트에 자동 응모되는 셈인데,
추첨을 통해 단 한 명의 주인공의 소원을 이워주는 프로젝트였다.
W백화점 한 해 매출은 이 기간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로젝트를 공동 기획한 방송사에선 매년 시청률 40%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찍었다.
기업과 방송사의 윈윈전략과 함께 대중들에게 희망을 전한다는
메시지 또한 성공의 원천이 된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응모자들은 넘쳐났고,
인생 한 방을 노릴 목적으로 지방과 외국에서까지 몰려들었다.
지원자들은 저마다 플레카드를 하나씩 흔들었다.
“집 사고 싶어요.” “세계 여행 하고 싶어요.”“아버지 병을 고치게 해주세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같은 소원까지 다양했다.
전광판 앞에선 리포터가 독특한 사연의 응모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개인기를 뽐내는 순서를 갖고 있었다.
“부질없는 짓거리...”
어제만해도 사랑꾼이었던 내가 하루만에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그 장면 보지만 않았어도...
정이사 방에서 정사를 나누는 유리를 창문 밖에서 보게된 것을.
밤샘근무한다고 핑계를 대던 그녀에게 주려고 애써 사온 커피를 창문으로
던져 버릴 뻔 했다.
더욱 화나는 건 유리의 교태스러운 몸짓이었다.
“정이사, 정말 진저리 칠 만큼 싫어요.”
작고 예쁜 입술로 말하던 그녀가.
더 원하고 있었다.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나는 눈물로 얼룩진 손으로 종이백에서
블라우스를 꺼냈다.
그것을 발기발기 찢어버리려고했다.
그러나 59만원짜리 블라우스를 함부러 할 수 없는
내 찌질함에 더 분노했다.
모든 층 마다 군중들이 꿈틀거린다.
처음부터 W백화점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길고 짧은 머리통들이 무대 공연을 보기위해 대열을 이루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몰리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나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사이언스톰 확 뿌리려버릴까?”
푸른 전기를 맞고 감전되는 그들을 상상한다.
그들이 핏물을 쏟아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하자 쾌감이 솟았다.
걸그룹의 무대가 끝나고,
잘 빗은 머리에 붉은 정장을 입은 진행자가 무대 중앙으로 올라왔다.
“W그룹이 후원하고 JBS에서 생중계되고 있는 드림2010!
여러분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준비되셨습니까?”
그때 고막을 찌를 듯 군중의 함성이 울렸다.
“이제 10분 뒤면 그 중인공이 공개됩니다.”
나는 2층 숙녀복 매장에서 유니폼을 전갈하게 입은 여직원을 만났다.
이틀 전 내게 응모권을 내민 그 종업원이다.
“어서 오세요.”
맘속으로 ‘저 여자에겐 사이언스톰을 쏘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키도 크고 잘 빗어 묶은 머리는 단정했다.
가슴엔 [여정인]이란 명찰이 붙여 있었다.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연락처를 물어봤을 테지만,
수컷의 감정을 느끼기엔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녀는 “이 새끼 뭔데 멀뚱하게 서있지?”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죄송하지만... 반품 좀...”
마치 하면 안 되는 말을 내뱉은 것처럼
뺨이 붉어졌다.
쇼핑백을 든 왼손이 부끄럽고 두 다리는 후들거렸다.
차라리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였다면 동정심이라도 얻지 않을까?
종업원은 쇼핑백에서 블라우스를 꺼냈다.
레몬색 블라우스의 상태를 살펴보곤
만족한 듯 옷걸이에 걸었다.
“영수증 가져 오셨죠?”
나는 꼬깃하게 접은 종이를 꺼내 보였다.
“이건 응모권이라서 영수증만 가능하거든요.
집에 두고 오셨으면 내일 영수증 가지고 다시 오세요.”
그녀의 태도가 단호해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표정은 곧 소리라도 지를 듯한 표정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그냥 가져갈게요.”
잽싸게 블라우스를 빼앗아 쇼핑백에 담았다.
뒤통수가 뜨거웠지만 더 이상 구차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2층 난간에 섰다.
지금 당장 블라우스를 처분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부정 탄 물건이다.
다시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엔 나이가 곱절 더 많아 보이는 직원이 맞았다.
“방금 오셨던 손님이죠. 반품은 안 되지만 교환은 가능하세요. 다른 걸 골라보시겠어요.”
매끈하고 점잖은 투로 유도했다.
그때,
정장 두 벌을 들고 들어오는 그 여직원이 보였다.
“이거. 저 분에게 주세요.”
“네?”
“.....”
다신 이 백화점을 찾지 않으리라.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속이 매스껍고 아랫배는 강펀치에 맞은 듯 쓰렸다.
그때, 로비에서 팡파레소리와 함께 군중들의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절정의 순간, 나는 고독했다.
***
모든 행사가 끝나고 이제 마지막 순서만이 남겨져 있었다.
“소망2010!! 과연 그 주인공은?”
진행자 허리 높이에 유리상자가 놓였다.
그 안엔 응모권이 담겨있다.
진행자가 신중하게 버튼을 누르자 유리 상자 안의 응모권이 마구 섞였다.
정지 버튼을 누르자 중간에 손바닥만한 문이 열리고 종이 한 장이 밀려나왔다.
진행자는 그것을 꺼낸 후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반 접었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드림 2010의 주인공.......!
광고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아..."
군중들은 탄식을 토했다.
진행자는 그 분위기를 즐기듯 뜸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군중들은 슬슬 지쳐가고있었다.
그러자
“20101201번. 축하드립니다.”
팡!하고 폭죽이 터지고 장내가 삽시간에 술렁였다.
동시에 일부는 응모권을 구겨서 바닥에 던져버리거나 밖으로 나갔다.
“20101201번 어디계신가요?”
진행자는 당황하듯 말을 이어보지만 당첨자는 나오지 않았다.
“여기 안 계신 것 같은데. 어...
당첨자는 추후에 저희가 방송에서 알려드리도록........”
그때 숙녀복 여직원이 레몬색 블라우스를 보여주며
담당 FD에게 귓속말을 했다.
***
나는 변기에 토사물을 모두 쏟아냈다.
이제 모두 비워냈으니 유리를 향한 미련도 그리움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변기 뚜껑을 닫아 멍하게 앉아있는데,
문 밖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쾌변중이십니까?”
무대에서 듣던 익숙한 목소리.
분명 소망2010 진행자 목소리였다.
그리곤 문 밑에서 손이 쑤욱하고 들어왔다.
그는 응모권을 흔들어 보였다.
“블라우스를 구입하셨죠?“
“그. 그런데요?”
진행자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여러분. 아무리 백퍼센트 리얼이라고 하지만 저희가 소원을 위해 화장실까지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드림2010 주인공.
드디어 찾았습니다!!“
진행자는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띄웠다.
“주인공은 아주 큰일을 하고 계신분이었습니다.
소망2010!
주인공의 소원은
개인적인 용무도 있고하니 광고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문 밖엔 최소한 열댓 명이 있는 것 같았다.
하필 이럴 때...
문을 열자마자 후레시가 쏟아졌다.
그리곤 이어리스를 낀 젊은 남자(FD)가 다가왔다.
“성함. 나이요.”
“네?”
“지금 시간 없어요. 성함. 나이요.”
“서른 넷. 최진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속에
스스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번엔 남자보다 나이가 열살 많아 보이는
여자(작가)가 노트 위에 볼펜 끄적이기 시작했다.
“소원 준비되셨죠?”
“네?”
“소원이요. 소원! 소원! 물건 사면서 생각 안 해보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