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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t Jang Jun 22. 2022

할로윈데이의 악몽

호주에서 국제미아가 될 뻔한 이야기

전 세계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휘청거렸고 호주 역시 불황이 시작되었지만 세상사와 경제에 관심 없었던 그 당시의 나는 전혀 알리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호주에서 살고 있던 친구에게 연락해 처음  살 숙소를 알아보고 시드니 지역을 익히는데 도움을 받고 처음 10일간은 원래의 목적(영어공부)도 잊고 마치 관광객처럼 신나게 돌아다녔다.


 원래 낯가림도 있고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타입이었지만  열심히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목표 의식(?)때문인지 늘 용기가 샘솟았다.

괜스레 길가는 호주인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커피숍에 가서 전혀 새로운 주문을 해보기도 하고, 은행에 가서 통장 개설 후 체크카드도 만들고, 우체국에 가서 한국 친구들에게 현지 엽서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전통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물건도 사보고...

정말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었다.


 도착해서 10일 정도 지났을 때 엄마와 통화를 했는데 별일 없냐는 안부전화에

"엄마! 여기 너무 좋고 안전해. 덕분에 적응 잘하고 있어. 걱정 마!"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매일이 두근거렸고 미래와 꿈을 향한 새로운 도전에 내일이 기대되었다.


 한국에서 모아 온 대부분의 돈으로 시드니 내에 유명한 어학원을 둘러본 후 한국인보다는 외국인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일 한국 워홀러가 작다는 좀 비싼 어학원에 몇 개월 코스를 어학수업을 신청하였다. (나중에 보니 워홀러가 작은 대신 한국 유학생들이 엄청 많았다는..)


며칠 후 고등학교 때 친구가 시드니로 신혼여행을 와서 마지막 날 함께 놀았고 귀국하는 그들을 배웅하러 시드니 센트럴 역으로 갔다가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미처 몰랐지만... 그날은 할로윈데이였다.




 우리나라도 요즘에는 아이들과 젊은 층 사이에서 할로윈파티를 많이 한다. 나 역시 얼마 전 딸과 할로윈파티도 하고 같이 잭 오 랜턴 케이크 만들기 체험도 했다. 그러나 10여 년 전쯤 우리나라에서는 할로윈데이가 지금처럼 성행하지 않았다.

반면 외국에서는 그때도 할로윈데이가 꽤 큰 축제라 함께 파티를 하였으나 간혹 불량한 사람들은 약을 즐기기도 한다.


친구를 보내고 시계를 보니 저녁 7시가 조금 지났다. 센트럴 역 밖으로 나오니 먹구름이 잔뜩 끼여있고 바람이 세게 불어 기분까지 좋지 않았다. 서둘러 집에 가려는 데 같이 배웅 간 친구가 자기네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찬성이었지만 그날따라 온몸을 감싸는 기운이 너무 안 좋아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역시.. 촉일지라도  불길한 기운은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친구가 오늘 남자 친구가 야근이라 늦게 오는데 혼자 밥 먹기가 싫다고 같이 가자는데 마냥 거절하기가 어려워 결국 그녀의 집으로 갔다.


시드니 대학 맞은편의 큰 대로변에서 1~2분만 꺾어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녀의 집이라 센트럴 역과도 무척 가까웠다.

그렇게 그녀의 집 앞에서 현관문을 열기 위해 그녀가 열쇠를 끼우려던 순간이었다.


"Hello?"

뒤에서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외국인들과 잘 지내는 친구가 뒤를 돌아보더니 악! 하며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다가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다. 나도 너무 놀라며 그때서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외국인... 그렇지만 호주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건장한 남자 셋이 서있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구가 열쇠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은 바람에 정면으로 돌아선 나의 가방을 세게 잡아당겼다. 거친 그들의 힘에 가죽 끈은 툭 끊어졌고 가방을 낚아챈 그들은 저 안쪽의 골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

정말 그 몇 분 안 되는 순간에 드라마처럼 백만 가지의 생각들이 쏟아졌다.

호주 온다고 새로 산 핸드백이 뺏긴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 통장, 새로 산 지갑과 카메라, 카드, 현금, 캐리어 열쇠 그리고 여권이 있었다.

숙소는 다 같이 생활하는 공간이라 분실 위험이 있어서 모든 귀중품을 항상 소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친구는 아직도 놀라서 쓰러져 있었고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여권이 없으면 국제미아가 되는 건가?’

하늘이 노래졌고 나는 서둘러 그들이 뛰어간 골목길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시월 말 무더운 호주 날씨 탓에 여름용 조리를 신고 있었지만 나는 발가락 사이와 발바닥이 다 까지도록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여권만 달라고 외쳤다.

"Please! give me a passport!!!!"

그들은 골목 사이사이를 뛰어갔고 나 역시 광적으로 따라갔다.

왠지 못 찾으면 진짜 국제미아가 될 것만 같아서 발악하듯 외치며...

그러다 어느 집에서 현지인 나왔다.

내가 "Help me"를 외쳤지만 정말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며 그는 지나갔다…


 나는 다시 미친 듯 달렸고 또 다른 집에서 나온 호주인 아저씨가 내 팔을 붙잡아서 휘청하며 나는 그대로 넘어졌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쏟아져서 펑펑 울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더 이상 가면 위험하니 따라가지 마라고 하며 나를 달래줬다.

펑펑 우는 내 울음소리에 이웃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아저씨는 상황을 내게 물으며 진정시키고 경찰서에 직접 전화를 해서 내 대신 경찰에게 영어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보통 호주에서 특히 동양인이 여권을 잃어버릴 경우 찾을 확률이 거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재발급을 해도 6개월에서 1년까지도 걸린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다들 위로를 해주며 한 마디씩 하였고 내 울음소리를 듣고 멀리서 쫓아온 친구는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내 가방이 날치기됐다고 하자 너무 놀란 듯하였다.


퇴근 후 온 그녀의 남자 친구(시드니에서 대학을 나오고 오래 거주함)에게 들은 바로는 잃어버린 물건들은 못 찾으니 포기하라며 내일 날이 밝은 데로 여권을 새로 신청하러 가자고 하였다.

게다가 미처 몰랐는데 내가 미친 듯 따라간 골목은 우범지대로 유명한 레드펀이란 곳이었는데 평소에도 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할로윈데이라서 행락객들이 약을 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며 더 큰일이 없었음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 불안에 떠는 나는 친구네 집에서 잠을 청했다. 사실 거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너무 막막했고 시작점부터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자 세명이 다가와서 가방을 뜯어 도망가는 그 공포스러운 환영도 계속되었다.


나는 두 손을 꼭 잡았다. 특정 종교는 없었지만 늘 힘든 순간에는 하느님, 부처님을 외치며 기도를 했었다. 그렇지만 그날 밤은 정말 간절했다.


너무 간절하게 진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제발... 저의 여권만이라도 찾게 해 주세요. 제발..'


그리고 새벽까지 눈물을 흘리며 잠을 설치다 잠깐 눈을 붙였는데 아침 일찍 친구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경찰이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들이 여권과 캐리어 열쇠만 레드펀의 어느 지역에 버리고 갔으니 경찰서에 와서 찾아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 이후 반년 이상 외국 남자가 가까이 오거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누군가 뛰어들어오면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물론 내가 그날 그냥 집으로 갔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더 악수가 생기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만약, 친구가 열쇠를 떨어뜨리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연 후 그들이 따라왔다면…

만약, 내가 끝까지 그들을 따라 레드펀 골목까지 들어갔다면…

만약, 내가 그때 자기 일처럼 도와줬던 호주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여권만 달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다면…

더 안 좋은 상황들이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십여 일 정도였지만 내가 방심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녀서 몰랐을 뿐이지 그 사건 이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호주 시드니도 불황으로 일주일 전에 한인 살해사건을 비롯해 뉴스에서도 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나는 그날 이후 좀 더 신중하고 안전하게 주변을 살피며 다녔고 다행히 목돈의 어학원 학비를 미리 낸 덕분에 수업도 무사히 들을 수 있었다.


다만, 남들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호주 생활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방 날치기 사건은  호주에서의 수많은 역경 중 시작일 뿐이었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나 돌아보면

그 경험들 모두 나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그 명제가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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