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arlett Jang Jun 03. 2022

서른, 직장을 관두고 호주로 떠나다.

외박도 허락 안 하던 엄마의 일생일대 결심

나는 부유하진 않았지만 엄마 덕분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매우 부유하게 태어났으나 초등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안일을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외할머니 대신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우리 엄마는 결혼을 해서도 강인하셨던 할머니의 시집살이로 평생 몸과 마음 고생을 하셨다.

그런 우리 엄마의 마음속에는 이런 믿음이 있었다.

'어릴 때 고생하면 평생 고생한다.'

그래서인지 삼 형제를 키우는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도 늘 나에게 손하나 까딱 안 시키셨다.

곱게 키운 자식이 평생 곱게 대접받는다는 생각에...


오히려 둘째, 셋째는 좀 더 개방적으로 키우셨는데 나는 첫째인 탓에 모든 것에 제약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외박은 당연히 불가하였고 남들이 수시로 가던 대학교 엠티도 겨우겨우 사정해서 과엠티 1번, 밴드 동아리 엠티 1번 이렇게 두 번을 허락받았다.

두 살 터울인 여동생이 교대에 들어간 후 엄마를 설득해서 엠티를 자주 간 덕분에(여동생은 나와 달리 매우 논리적으로 말을 잘한다.) 나도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무사히 졸업작품 패션쇼 준비를 위해 간간히 밖에서 밤을 새우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졸업 후 다양한 시련을 겪었고 패션디자인을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전공에 연관이 있는 웨딩플래너, 커플매니저, 웨딩홀 드레스샵 등의 일 등을 했지만 직업명과 달리 고객 확보, 텔레마케팅, 잡무가 주 업무인 데다가 너무 박봉이라서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완전히 마음을 닫은 후 내가 좋아하고 자신 있었던 수학강사가 되기로 하였다. 물론 수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고등학생은 가르치지 못했지만 이름 있는 프랜차이즈 종합학원에서 초, 중등을 대상으로 수학강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대 후반에 가까워질수록 체력도 급격히 떨어지고 대학생 때 무리한 노래 연습으로 목이 많이 상한 상태라 매일 큰소리로 강의를 하니 자주 아프고 목이 잠겼다.

게다가 시험기간이 되면 무리한 특강 수업일정에 수십 명이나 되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몸살로 입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몇 살까지 이 직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침마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시범 강의를 하며 서로 솔직한 장단점 분석하는 것도 처음에는 스트레스였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익숙해져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학과 전공이 아니라서 유리천장이 느껴졌다.


내 나이 30살을 앞둔 어느 겨울날 , 우리 동생은 교대 CC 였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였다.

늘 과 톱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자마자 선생님이 되었고 4년 정도 일하고 바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라 결혼은 커녕 사랑을 불신하던 29살이었고, 미래가 불안한 학원 강사였기에 늘 마음이 심란하였다.


우연히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읽은 후 국내 외박도 거의 안 해본 나는 엄마에게 꼭 중국을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미 동생들은 중국,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였기에 나도 휴가를 내서 막내 남동생과 중국 여행을 패키지로 다녀왔다. 그리고 비록 패키지여행이었지만(그 당시 남자도 중국 자유여행을 하긴 위험한 시절이었다.) 다녀온 후 나에게 엄청난 심적 변화가 찾아왔다.


그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영어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한창 말하던 시기였는데 그 걸 본 순간 나는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영어 회화는 완전 초보수준이였기에 학원에 출근하기 전 영어회화 새벽반을 열심히 수강하였고 몇 개월 후 원어민 초급반으로 갈 수 있었다.

원어민과 대화를 할수록 나는 더욱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비록 어릴 때 꿈처럼 유학은 못 가더라도 외국에 가서 어학연수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영어를 공부하였다.


내 동생은 엄청난 독서광이었는데 결혼 전 도보 1시간 정도의 부산시립도서관을 나와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었다. 결혼 후에도 가까이 살지만 동생이 생각날 땐 굳이 버스를 타지 않고 도서관을 혼자 자주 걸어 다녔다. 그리고 덕분에 책도 엄청나게 읽었다. 그때 우연히 읽었던 책이 '호주 워킹홀리데이'였고 나는 서른이 끝나기 전 호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늦여름이었기에 시간이 얼마 없어서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나이만 30살이었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린애 같았다. 먼 곳은 다녀본 적도 없는 데다 이것저것 무서운 것도 많았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았던 우리 엄마는 의외로 몇 번의 설득에 꽤 쉽게 외국생활을 허락해주셨다.

(아빠는 나에게 늘 크게 반대가 없으셨다.)

우리 엄마의 성격을 잘 아는 내 친한 친구들은 외박도 안 되는 내가 허락을 받았다고 하자 다들 엄청 놀랬다.

어려서부터 뭐든지 알아서 척척해내고 일찍 자립한 둘째와 다르게 계속 방황만 거듭하고 겁은 엄청 많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큰딸에게 혼자 외국생활을 허락한 것은 엄마에게 일생일대의 결심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너는 외국 나가서 고생을 좀 해봐야 된다. 그래야 좀 철이 들지."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국제통화는 비싸니 연락은 거의 안 할 거야. 섭섭해하지 말아라."라는 섭섭한 말도 있지 않으셨다.

물론 호주 가서 진짜 엄청난 역경을 겪게 되었고 결국 엄마가 국제통화 월정액제를 가입하셔서 매일 통화를 하셨지만..


직장에 퇴사 통보 후 한 달 반가량 선생님을 새로 트레이닝시킬 때까지 근무를 하고 그러는 사이 호주 입국 및 최소 1년 살이 준비를 하였다. 처음 목표는 2년까지 연장하며 테솔 공부까지 하고 올 계획이었다.

출국 날이 둘째 동생의 출산 예정일 2주 전이었는데 마침 출국 전날 조카가 일찍 태어나서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것저것 가득 쑤셔 넣은 이민가방의 용량이 너무 오버돼서 공항에서 다시 물건을 엄청 빼내며 엄마랑 가는 날까지 실랑이를 하였다.

그리고 커다란 이민가방과 작은 휴대용 캐리어를 들고 출국장으로 들어갈 때 직전까지 다투던 엄마를 문이 닫힐 때까지 쳐다보았다.

엄마가 손을 흔들며 서글픈 눈망울을 보이자 나도 모르게 북받쳐 입구에서 한참을 펑펑 울었던 것 같다. (너무 심하게 울다가 비행기 탑승 후 식사를 바로 해서인지 계속 구토를 했었다.)


캐리어의 오버웨이트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 이후 환승하려고 내린 일본 공항에서 예약한 내 좌석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 스튜어디스와 한참을 어설픈 영어로 대화 후 다른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기내에서는 계속 구토를 하다 잠들었는데  밤에 깼을 땐 컴컴하게 덜컹거리는 느낌만 들자 새로운 꿈을 향해 날고 있는 나 자신이 화물칸에 실려어디론가 끌려가는 동물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두려움이 가득한 채 저지른 나의 호주 생활은 시작되었고 역시나 더욱 파란만장한 일들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 일 이후 나의 인생은 매우 풍부해졌고, 인생에 대해 배운 점도 무척 많다.

더구나 오히려 떨어져 지내면서 엄마의 고마움을 깨달을 수 있었고 사이도 더 좋아졌다.


세상의 어떤 경험도 모두 다 결국 인생의 값진 보석이 되어 남는 것 같다.

내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보석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겠지만 한 발 내디뎓기에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겁이 많지만 때론 무모하며,

생각이 많지만 도전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40대이지만 50대에도 60대에도 그 이후에도

난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맥도날드 알바 3년 하고 적성 발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