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업무 그리고 근로계약

1인 기업에서 사원으로 살아남기(3)

by 정훈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첫 출근해서 대표님께 전화로 업무지시를 받았다. 첫 업무는 PC세팅, 전임자가 남겨둔 인수인계서 탐색 그리고 PPT제작 업무였다.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못한 나는 1인 기업이라는 전장에서 그저 말하는 감자였기 때문에 실전에 빠르게 투입되기 위해선 출근 첫날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맡아서 해야했다.


나에게 주어진 주요 업무는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회사가 교육 프로그램을 직접 또는 위탁받아서 운영하는 교육 회사였기 때문에, 주로 대학이나 고등학교 또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HR팀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해야했다. 제안서는 크게 글자 위주의 한글 문서 형식과 PPT등을 활용한 이미지 위주 형식으로 나뉘는데, 나는 PPT를 활용해서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PPT제작 업무는 대학 시절, 발표자료를 만드는 일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제안서 제작 업무는 단순히 발표 내용을 시각화하는 수준이 아닌, 처음부터 사업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을 구성하고 제안서를 받아보는 고객사의 수준에 맞춰서 제작해야하는 고도의 작업이었다. 방금 입사한 회사에서 무슨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는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고객사가 원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혼자서 자료조사부터 PPT 장표까지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일단 제안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대표님이 출근하시고 인사를 나눈 뒤, 업무에 대한 안내와 제안서가 무엇인지 대표님과 회의를 하면서 설명을 들었다. 제안서는 말 그대로 당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고객사에게 소개하고 제안하는 문서로, 사업 배경, 사업 내용, 제안사에 대한 소개 등이 기본적으로 포함된다. 그리고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실질적인 효과인 기대효과를 중점적으로 작성해야한다. 쉽게 말해 우리 회사의 제품(또는 서비스)을 이용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문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안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후에 당사에 어떤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고객사의 특성은 무엇인지, 주의할 점 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회의 내용과 자료조사를 기반으로 제안서에 들어갈 내용들을 작성했고, 작성된 내용을 기반으로 PPT로 디자인하는 시각화 작업을 진행했다. 디자인 비전공자이었기에, 나름 유튜브 강의도 찾아보고, 구글 검색이나 핀터레스트, 미리캔버스 등 여러 디자인들을 찾아보면서 괜찮은 디자인을 베끼는 방식을 채택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랬나.

처음 만든 제안서(실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블러처리 했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우여곡절 끝에 겨우 완성을 했다. 당시에 처음 만든 제안서를 보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지금와서 보면 디자인적으로나 내용 구성면에서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지만, 사회의 일원이 되어 한 몫을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내가 만든 제안서가 대학에, 기업의 담당자에게 전송되어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과정은 지금도 짜릿하다.


여담이지만, 사실 첫 출근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직원이 나 혼자라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근로계약 상에 큰 문제가 생겼다. 실습을 마치고 스카우트 제안 당시에 나에게 책정된 급여는 최저시급이었다. 연봉계약이었지만 내가 받는 급여는 사실상 최저시급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대표님께서는 정부에서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청년취업 지원금 몇십만원을 월급에 추가로 지급하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스카우트 제안을 고민하는 일주일동안 주변 지인들에게 이 지원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 지인들은 대부분 지원금은 보통 대표가 가져가는데 요즘 그런 사람이 어딨냐면서 회사와 대표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사실 최저급여를 받으면서도 경험삼아서 일을 할 생각이었기에 지원금에 대한 내용은 당연히 희망적인 요소였다.


첫 출근날 오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계약서에 지원금에 대한 내용이 일절 없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내용을 대표님께 여쭤봤고, 그 대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 그건 제가 커뮤니케이션 상의 오류가 있었네요.' 당연히 급여는 최저였고, 지원금은 받을 수 없었다. 사람 마음이라는게 참 그렇다. 최저를 받아도 일할 생각이었지만 준다고 했다가 안준다고 말이 바뀌니까 내 것을 뺏긴 기분이었다. 또한 출근 첫 날부터 말이 바뀌는 대표인데 앞으로는 얼마나 말을 바꿀까 싶기도 해서 계약서에 사인을 잠시 미뤘다. 밖에 나와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을 말씀드렸다. 아버지께 ‘배울건 다 배우고 이용할 건 최대로 이용하고 그만둬라.'라는 조언을 들었고,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사인을 한 뒤 대표님이 나의 표정이 안좋은 걸 봤는지, 기존에 작성한 계약서를 파기하고 연봉을 올려서 다시 계약하자고 했다. 연봉은 50만원 올려줬다. 월급도 아니고 연봉 50만원이라니. 그러고는 덧붙이는 말이 회사 역사상 최대 연봉이란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1인 기업의 한 명뿐인 직원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스카우트 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