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기업에서 사원으로 살아남기(5)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직서가 불현듯 밀려 나올 때가 있다.
입사 6개월 차, 업무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전공과 무관한 반복되는 디자인 업무로 진한 현자타임을 겪고 있을 때였다. 입사부터 동고동락하던 키보드가 과로가 온 건지 끝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전임자가 쓰던 키보드다). 임시방편으로 집에서 쓰지 않는 키보드를 들고 와서 사용 중이었는데, 그걸 보고 대표님께서는 "회사에 개인물품 가져와서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과 동시에 "새로 사 줄 테니 골라보세요."라고 멋지게 말씀해 주셨다. 금액 한도는 20만원이란다. 아, 이게 어른이구나. 이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어야 대표하는구나 싶었다. 들뜬 마음으로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오자마자 온라인 쇼핑에 들어갔다. 20만원짜리 스펙은 과한 것 같아서 양심껏 10만원 중반대의 키보드들을 정리해서 가격과 후기를 꼼꼼히 검토하는 중이었다.
"정훈씨, 그냥 제가 괜찮은 걸로 주문했어요~"
청천벽력이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의 직속상관인 대표님은 입사 첫날부터 급여 문제로 말을 바꾼 이력이 있었기에, 그동안 쌓인 빅데이터가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사실 좋은 키보드는 필요 없다. 그저 평범한 키보드여도 괜찮았다. 그리고 20만원 한도였으니, 대표님이 주문한 키보드는 최소 7~8만원 정도였으리라.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사무실 문 앞에 택배 상자가 놓여있었다. 박스에 붙어 있는 송장에는 키보드 품명이 적혀있었다. 기대와 불안한 마음을 반반씩 품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노란색이었다. '노란색?', '왜 노란색이지?' 키보드가 포장된 박스 겉면에는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포인트가 들어간 키보드와 같은 디자인의 마우스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키보드 포장을 풀기 전에 박스 겉면에 쓰여있는 모델명을 검색창에 천천히 입력했다. 망설임 끝에 엔터키를 눌렀을 때 모니터에 나타난 제품 최저가는 실소를 터트리기 충분했다.
26,230원
20만원 아니, 10만원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키보드와 마우스 세트라면 2만원 중반이어선 안된다. 그럼 그렇지. 며칠 동안 일말의 기대를 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직원에게 아껴서야. 허탈한 마음을 안고 포장을 풀어서 책상에 놓아보았다. 사무용 키보드라곤 턱없이 작은 크기와 휴대성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키배열과 툭 치면 날아갈 듯한 가벼움. 싸구려 중에 싸구려였다. 물론 이 제품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휴대용으로 사용하기에 충분하고, 가성비가 넘친다. 하지만 사무용 키보드는 아니다. 그리고 20만원에서 2만원대는 더더욱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
문제의 키보드다. 우측 방향키를 누를 때마다 컨트롤키가 계속 눌려서 그냥 빼버렸다. 심지어 자판은 힘을 주어 누르지 않으면 눌리지 않았다. 위아래 방향키가 삐뚤어져 보이는 건 기분 탓일 거다. 그저 절망적인 키보드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님이 출근하셨을 때 일단 웃는 얼굴로 잘 쓰겠다는 말로 감사 인사를 했다. 적응하면 괜찮아지겠지. 그리곤 바로 다음 날 사비로 키보드를 주문했다. 그리고 대표님께는 도저히 못쓰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쓰겠단다. 몇 시간 눌러보더니 "아 이거 사무용으로 쓰기에는 불편하네요." 그리고 그 키보드는 회의실로 좌천당했고, 사비로 주문한 키보드를 쓰자마자 평균 타수가 100타가 증가했다.
사무실 한 켠에는 정사각형 테이블의 탕비실이 있다. 그 위에는 녹차 티백, 맥심 커피 그리고 과자 몇 개가 놓여있다. 어느 날 대표님이 쿠크다스를 새로 채워놓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거 유통기한 지났는데 먹어도 괜찮은 것 같아서 집에서 가져왔어요."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직서가 불현듯 밀려 나올 때가 있다.
그때가 지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