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기업에서 사원으로 살아남기(8)
지방 출장 때 일이다. 나는 사무실에 있었고, 대표님이 직접 출장을 가셨다. 그곳에서 대표님은 1년치 들을 욕을 다 들으셨다고 한다. 현장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무실에서 전화로 전달받은 나로썬 모두 알 수 없었지만, 다음날 대표님이 돌아와 하신 담담한 말 한마디가 그날 상황을 대변해줬다.
“돈을 얼마를 준대도 다시는 거기랑 안하려구요.”
6개월 전에 영업 차 방문했었던 지방의 한 대학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방문 당시에 담당부서의 첫 인상이 좋았기에 흔쾌히 수락을 했다. 대학의 연례행사를 위탁받아서 운영하게 되어 나와 대표님은 교육 내용부터 강사, 점심도시락, 다과 등 모든 요소들을 최상으로 준비를 했다. 박사급 강사진과 대학의 요구에 맞는 맞춤형 교육 내용으로 구성했고, 인스타와 블로그를 검색해서 후기가 가장 좋고 단가도 적절한 도시락, 다과 업체에 연락해서 일정에 맞추어 주문을 했다. 그렇게 이해관계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해가며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또 현수막이었다(지난 현수막 실수 - https://brunch.co.kr/@scent22/6). 하지만 이번엔 현수막 오타는 없었다. 대학에 현수막 시안을 미리 요청했었는데, 배송 일정이 임박한 때까지 시안을 보내주지 않는 바람에 현수막이 없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임의로 디자인을 해서 예비용으로 주문을 했다.
대학에선 프로그램 운영 3일 전쯤에 현수막 시안을 보내줬다.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여지껏 2일내로 배송이 도착했기에 걱정을 안고 시안을 참고해서 제작을 했고, 프로그램 운영 전 날에 현수막 배송 일정을 다 확인했다. 먼저 제작한 현수막은 전 날 저녁에 도착 예정이었고, 두번째로 제작한 현수막은 당일 오후에 도착 예정이었다. 두번째로 제작한 현수막은 당일에 사용이 어려워보였지만, 먼저 제작한 현수막이 있었기에 한시름 놓았고 대표님도 안도를 하셨다.
프로그램 운영 당일, 출근길에서 휴대폰에 쌓인 부재중 전화와 문자내용을 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현수막이 안왔어요", "정훈씨 현수막 빨리 확인해주세요"
출근길에 전철역으로 뛰어가며, 택배사와 현수막 업체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자동 ARS와 챗봇으로 연결될 뿐 상담사와는 연결될 수 없었다. '분명 어제 저녁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뭐지 어떻게 해야되지?' 그대로 패닉이 왔다. 운송장 번호를 택배 조회 사이트에 아무리 입력해도 '배송중입니다'라는 상태밖에 보이지 않았고, 배송기사 연락처도 확인할 수 없었다. 발만 동동 구르며 출근길 지하철에서 대표님과 담당자와 번갈아가면서 통화를 했는데, 현장은 난리가 나있었다.
대학 담당자들은 대표님에게 '기본도 안되어있네', '최악의 업체다' 등 피드백을 넘어서 모욕적인 말들을 내뱉고 있었고, 대표님은 연신 죄송하다며 금방 도착할거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대표님은 나에게 서울에서 지방까지 퀵을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수를 총동원해서 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택배 조회도, 배송 기사 연락처도 나오지 않고, 업체나 택배사에 전화하면 보이는 ARS로만 연결되는 상황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사무실에 뛰어들어가 택배사 배송조회 창을 열어 연달아 새로고침을 하다보니 배송상태가 도착 예정으로 바뀌고 배송기사의 연락처가 나왔다. 바로 배송기사님에게 연락을 하니까 연휴라서 배송이 밀렸고, 운이 없으면 오늘 출하가 안될 수도 있다고 한다. 기사님에게 너무 급한 사항이니 출하되면 바로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거의 빌다시피 했다.
그리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현지 퀵 업체를 찾아서 택배 터미널부터 도착지까지 견적을 받고, 택배가 오늘 안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퀵 기사님에게 물건 픽업을 해와달라는 무리수를 던졌다. 요금이 얼마가 나오든 사비를 써서라도 지불할 생각이었다. 퀵 기사님은 물건이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 반문했지만, 사정사정해서 요청을 드렸다.
홀로 있는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기도란 기도를 총동원하면서 10분, 20분 그 억겁 같은 시간이 갈수록 모두가 초조해졌다. 그러던 차에 택배 기사님에게 물건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고, 때마침 없을 수도 있는 물건을 픽업하러 가는 길이었던 기사님은 다행히 물건을 픽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현장에선 프로그램 운영 시작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현수막 때문에 시작을 미룰 순 없었고, 결국 현수막이 없는 채로 프로그램은 진행되었다. 허탈함과 허무함이 몰려왔고, 그 사이 대표님은 담당자에게 '마치고 잠깐 봅시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다. 프로그램이 시작된지 한시간정도 지났을 때, 퀵 기사님이 현장에 도착했고, 점심시간에 현수막을 늦게나마 설치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교육 만족도는 5점 만점에 4.6점으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사실 참여자들 입장에서 현수막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닐 것이다. 구비한 간식과 음료는 물론이고, 소불고기 도시락과 다양한 과일과 정과가 포함된 다과세트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만족도로 나타났다. 당연히 교육 내용과 강사의 만족도도 높게 나타났고, 전해들은 바로는 참여자들의 현장 분위기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후에 대표님은 대학 담당자에게 피드백이란 이름의 비난을 모조리 감수하셔야했고, 나는 사무실에서 씁쓸함을 안고 퇴근을 했다.
다음날 대표님은 수척해진 얼굴로 출근과 동시에 담담한 말투로 한마디를 던지셨다. “돈을 얼마를 준대도 다시는 거기랑 안하려구요.”
프로그램을 마치면 결과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한다. 혹여나 보고서로 트집잡힐까봐 완벽하게 작성했다. 오타와 표, 그래프, 수치는 물론이고, 자간과 행간까지 모두 완벽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변은 "표 칸이 너무 넓은 것 같은데, 조금만 줄여주세요." 였다.
그 날 알았다. 세상은 갑과 을로만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