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초의 부재가 만든 무한한 바다

로맨스로 시작된 혁명, 그 아이러니한 운명

by 안도현

어린 시절 기억 한 토막이 불쑥 떠오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지며 찾고 있던 영상 하나.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던 그 답답함.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갈증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무한한 영상의 바다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2005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이 등록됐다. 세 명의 젊은 개발자가 품은 꿈은 그야말로 로맨틱했다. 동영상 소개팅 플랫폼. 사용자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영상을 올리고, 그걸 보고 이상형을 찾아가는 디지털 큐피드의 화살 같은 서비스를 구상했던 것이다.

창업자들의 진심은 대단했다. 크레이그리스트에 "매력적인 여성에게 20달러 지급"이라는 광고까지 올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응은 처참했다. 사랑으로 포장한 아이디어는 현실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로맨스로 시작된 꿈이 첫 관문에서부터 좌초되고 만 것이다.

돌이켜보면 세상을 뒤바꾼 혁신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혁신'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일상의 불편함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던 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폰도 결국 컴퓨터와 휴대폰을 하나로 합친 것이고, 유튜브도 TV를 인터넷에서 보려는 욕구의 연장선이었으니까. '조금의 적극성'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진짜 전환점은 2004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일어났다. 자넷 잭슨의 의상 트러블, 그 유명한 '니플게이트' 사건 말이다.

PayPal에서 일하던 자웨드 카림은 그 0.5초의 장면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TV는 이미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어갔고, 인터넷 어디를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사라진 찰나의 아쉬움이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다.

생각해보라. 단 0.5초.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부재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한한 영상의 저장고가 탄생할 수 있었다. 마치 빈 화분 하나가 정원 전체를 다시 꾸미게 만드는 것처럼, 찾을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모든 순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때 창업자들은 과감히 피벗(pivot)*했다. 소개팅 영상 따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건 '보고 싶은 영상을 언제든 찾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욕구가 기술과 만났을 때 벌어지는 마법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호기심, 기억하고 싶은 욕구,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 이런 본능적 갈망이 디지털과 결합하면서 세상을 뒤흔드는 혁신으로 탄생하는 것 말이다.


* 사업 방향을 전환하거나 전략을 수정하는 것



소개팅 플랫폼의 꿈이 산산조각 난 후, 창업자들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누구나 영상을 올리고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아이디어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2005년 4월 23일, 역사적인 첫 번째 영상이 업로드됐다. 자웨드 카림이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찍은 "Me at the zoo"라는 19초짜리 영상이었다.

"이 코끼리들은 정말 긴 코를 가지고 있다. 멋지다"

그가 중얼거린 이 단순한 한마디가 새로운 시대의 첫 번째 기록이 됐다. 얼마나 소박한 시작인가. 거대한 혁신의 출발점이 코끼리 앞에서 던진 평범한 한마디였다니.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일상이 기록될 수 있는 무한한 저장고가 열린 것이다. 누구든 자신만의 영상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거였다.



2006년 11월, 구글이 16억 5천만 달러에 인수 발표를 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년 반. 발렌타인데이의 로맨틱한 꿈이 전 인류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기까지의 짧지만 농밀한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의 혁신들 상당수가 이런 식이다. 트위터는 원래 팟캐스팅 플랫폼이었고, 인스타그램은 체크인 앱이었으며, 슬랙은 게임 회사의 내부 메신저 도구였다. 처음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세상을 바꾼 사례들 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처음 아이디어가 틀렸다는 걸 빠르게 인정하고,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예민하게 포착해서 과감히 방향을 바꾼 것이다. 고집부리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거다.

유튜브의 경우는 더 흥미롭다. 연결하고 싶다는 본래 목적은 그대로 두고, 방법만 바꾼 것이다. 남녀를 연결하려던 마음이 결국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한 셈이니까. 목표는 같았는데 규모가 달라진 거다.



밤늦게 유튜브를 켜고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무한히 펼쳐진 영상의 바다가 한때는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사라진 0.5초 때문에 생긴 갈증이 이토록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냈다니.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던 그 순간이 결국 모든 순간을 보관할 수 있는 무한한 서랍을 탄생시킨 것이다.

우리의 일상 속 실패들도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을까. 소개팅 앱을 만들려다 유튜브가 된 것처럼, 지금 우리가 포기하려는 그것들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세상의 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건 실패를 단순한 좌절挫折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그것을 선회의 신호로, 새로운 가능성의 실마리로 읽어내는 예민함. 그리고 방향을 바꿀 용기.

결국 혁신이라는 건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상의 불편함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수업 끝나고 망설임 없이 선생님께 질문하러 가는 친구들처럼 말이다.

오늘 밤 유튜브를 켤 때, 그 첫 화면 너머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실패 속에 스며든 혁명의 무게를, 0.5초의 부재가 만든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당신의 작은 좌절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갈증을 해결해 줄 샘물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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