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는 길에도 해방의 발자국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이 전해지자 부산 시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일보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태극기를 꺼내 들기도 전에 거리 곳곳에 붙어있던 일본식 간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장수통'이라 불리던 번화가는 며칠 만에 '광복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펼쳐본 역사책에서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을 되찾는 일은 단순한 간판 교체가 아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매일 지나던 거리 이름 속에도, 80년 전 누군가들이 흘린 눈물과 환호가 담겨 있었다는 걸.
일제강점기, 전국의 중심가는 하나같이 '혼마치本町'라고 불렸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어디나 똑같은 이름이었다. 마치 우리 도시들의 개성마저 지우려는 듯이.
해방이 되자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까.
태극기가 하늘에 펄럭이고 만세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리의 이름까지 바꾸며 진짜 해방을 실감하려 했다.
서울의 혼마치는 충무로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대구는 동성로, 광주는 금남로가 되었다. 부산의 장수통은 광복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광복동.
이 세 글자가 품은 무게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세 글자엔 어둠 끝에 돌아온 새벽의 환호가 담겨 있다.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 그 자체였으니까. 해방은 땅 위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거리의 이름에서도, 사람들의 입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거리들을 지난다. 충무로 지하철역에서 내릴 때마다, 광복동 간판을 올려다볼 때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해방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지명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잊혀서는 안 될 역사를 거리 곳곳에 새겨두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동네 이름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의지,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염원이 스며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여러분이 사는 동네 이름은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까. 혹시 일제강점기의 아픈 기억을 딛고 새로 지어진 이름은 아닐까.
집에 돌아가는 길, 한번 천천히 주변의 지명들을 살펴보자. 간판에 적힌 동네 이름을, 지하철역명을, 버스 정류장 이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그 속에서 80년 전 되찾은 빛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 위에도 해방의 발자국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의 이름이 곧 우리가 되찾은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