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책임져야 할 고양이와 식물이 있다

by 재원

1.

그날 나를 본 사람들은 '오늘도 참 밝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어디 스치기만 해도 울음이 왈칵 나올 것 같은 날이었다.


2.

할 일을 다 끝내고 집에 도착했다. 거실 불을 켤 여력도 없이 바닥에 털썩, 멍하니 주저앉았다. 안도하는 마음이었을까, 온갖 감정을 다 끌어다 행복한 척 연기한 덕분일까. 분명 밖에 있을 때만 해도 울고 싶었는데.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5분, 10분 두터운 패딩을 껴입고 오른손 끝엔 가방 끈 자락을 쥐고 하릴없이 찬 바닥에 앉아 있었다.


3.

앞으로 삶이 막막했다. 어쩌다 인생이 이 지경이 된 건지도 모르겠고, 아 나는 왜 이리 나약한 건지 그렇게 무너져놓고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이깟 이별이 뭐라고. 내가 찼잖아. 왜 내가 힘든데. 미련 없잖아 최선을 다 했잖아.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잖아. 그렇게 힘들었잖아. 개새끼. 왜 헤어져서도 날 괴롭히는 거야.

억울함, 그래 그때 내 머릿속을 뒤흔든 건 억울함이었다.


4.

멍한 시선 끝엔 갸우뚱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고양이가 있었다. 한참을 그와 대치하다 "아 맞다 밥.."

그래, 네 밥은 줘야지. 겨우 몸을 일으켜 서랍에 있는 습식 파우치를 꺼내 도자기 그릇에 댕그랑 담는다.

그리고 눈길을 돌리자 제 주인마냥 축 처져있는 고사리 화분이 있었다. "아 맞다 물.." 한숨을 한 번 푹 쉬고 화분을 한 데 화장실 바닥에 모아 멍하니 샤워기로 물을 뿌린다. 화분을 들어 뚝뚝 떨어지는 물을 털고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신경 못 쓴 사이 꽤 많이 자랐다. '봄이라 새 잎도 나네, 귀엽다. 죽은 잎은 좀 떼고..'


5.

너희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시커먼 방바닥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갈 이유를 준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너희를 책임지게 되어 고맙다고. 내일은 네 발톱을 깎아야 하니까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올터이고, 슬픔에 잠겨 술을 먹지 않을 것이고. 그다음 날은 네 안과 진료 때문에 병원을 가야 하니까 누워서 우울에 허덕이고 있지 않겠지. 식물에 물을 준 김에 창문도 열고, 창문을 연 김에 청소도 하고. 아, 흙 때문에 화장실 바닥이 더러워졌으니까 화장실 청소도 해야지. 그러다 보면 내 마음까지 거뜬히 책임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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