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르시시스트와 연애했다

#1

by 재원

1.

헤어졌다. 후회도 미련도 없다. 이보다 더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사랑을 받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정한 모양이 아니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며 왜곡하고 찢어놨다. 그리고 왜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냐며 끊임없이 시험하고, 의심하고, 괴롭혔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콩쥐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2.

누군가와 헤어지고 이렇게 후련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나는 그와 만나는 동안 진심이었다.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참고, 기다렸다. 그는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놨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그는 내 손을 잡은적 조차 없다.


3.

그럼에도 마음은 아프다. 진심으로 좋아했고,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때 그 사람을 버텨냈던 내가 대견하고 안쓰럽다. 내가 잘하면 그 사람이 바뀔거라 생각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대신 변한 척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나를 향한 고문이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달라지려고 노력하는데, 너는 왜 몰라주니" 그가 말했다. 연인에게 눈치를 주지 않는 것, 잘 지내다 갑자기 돌변해서 화를 내지 않는 것, 무안하게 만들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대체 왜 노력을 해야 가능한 일인지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4.

나는 '헤어졌다' 대신에 '탈출했다'라는 말을 쓰고 싶다. 그만큼 그와 만나는 1년은 감정의 감금이었다. 그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가도 잡으러 오고,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해도 미안하다고 빌며 잡으러 오고, 바보같이 그 때마다 믿어줬다. 믿음의 대가는 더 큰 상처와 배신이었다.


5.

그에게서 탈출한 뒤 상담을 갔다. 상담 선생님은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조심스레 그가 나르시시스트이자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는 것 같다 하셨다. 처음엔 부정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인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했던 행동들, 말들이 증거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니 거짓말이다. 마음이 헤집힐 대로 헤집혀서 내장까지 다 쏟아져 나온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깨달은 중요한 한가지. '이건 내 문제가 아니었구나'.


6.

누군가 '그런 성격인지 모르고 만났나'라고 묻는다면, 10%는 알았고 90%는 몰랐다고 답하고 싶다. 가끔 말을 차갑게 하고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분명히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선배, 다정한 동료, 어른들이 예뻐하는 후배, 인기 많은 친구였다. 그는 어딜가나 재치있고 재밌고 센스있는 사람이라며 환영받았다. 그의 성격이 부러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주고 받는 질문의 비율까지 50:50으로 설정해 놓는(그렇게 한다고 그가 직접 말했다.) 철저히 계산된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이었다. 연인에겐 막말을 서슴치 않고, 자신의 틀 안에 갇히지 않으면 벌컥 화를 내는 사람. 그런 그의 지인이 그를 협조적이고, 다정하고, 친화적이며 무던한 사람이라 칭찬할 때면 이따금씩 역겨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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