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계절이 이따금씩 바뀌었다

by 재원

1.

이별을 고한 쪽인 나는 약 한 달의 시간 동안 그가 내게 준 상처, 불안, 증오 같은 감정들을 연료 삼아 그에게 다시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들로 치환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심연 깊숙이 넣어뒀던 상처까지 헤집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라며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뇌는 그럴 때마다 아니, 피하지 말고 똑똑히 들여다보라며 그날의 온도, 촉감, 분위기까지 생생한 기억을 눈앞에다 가져다 놨다.


2.

이상하다. 이번 주는 나를 한 달 내내 괴롭혔던 그와의 기억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월요일은 상담을 받으러 가서 상담선생님께 그간 그와 있었던 일들을 아주 담담하게 털어놨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겪었던 가장 충격적인 일들, 나를 끝까지 괴롭혔던 그 일은 상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자려고 누워있어도 치밀어 올랐던 기억이었는데.. 너무 충격적이었던 사건이어서 잊은 걸까? 해리성 기억상실..(?)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마 그런 기억들은 글로 다 남겨놔서, 뇌에서 억지로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삭제 버튼을 눌러준 것 같다. 글쓰길 참 잘했다.


3.

이별의 미움, 증오, 나쁜 기억들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공허함만 남는다. 더 이상 태울 연료는 없고, 재만 풀풀 날리는 빈 공간은 잡다한 감정들이 눈독 들이기 딱 좋은 자리다. 이때다 싶어 미련, 애틋함, 좋은 기억, 그의 냄새, 추억이 툭툭 그 자리를 꿰차고 싶어 나를 건드려본다. 나는 당황한다. '아니, 나는 다 잊었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내 진짜 감정이라고? 내가 아직 그 사람을 못 잊었다고?' 그에게 돌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분명 끔찍하다. 아, 그렇다면 이건 가짜구나. 그냥 어디 구천을 떠돌던 한 때의 감정들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중이구나.


4.

분명, 언젠가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했을 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 하나 돌볼 새 없이 미친 듯이 달렸고 이뤘을 때. '그래서 이제 뭐 하지?' 하고 찾아오는 상실감과 공허함. 그와의 모든 감정을 태우는 데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나서의 공허함. 분명 비슷한 감정이다. 그래서 난 그때 뭘로 공허함을 채웠나 생각해 보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공간은 참 깊기도 해서 채워지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메워지지도 않을 때가 있지만 혼자서 이뤄내는 좋은 경험들, 친구들이 주는 격려, 좋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에너지들이 모여 아주 천천히, 차곡차곡 차오를 것이라는 걸 안다.


5.

그러니 조급해지지 말자, 그 빈 공간을 그와의 끔찍한 기억들로 채우고 비워내기까지 너무도 아팠고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들은 아직 아물지도 않았으니까. 미운 감정들이 오면, '아 왔구나'하며 잠시 있다갈 수 있도록 자비도 베풀어주고, 좋은 감정들은 잘 다듬고 닦아서 쏙 넣어두자.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초점을 맞추고,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살다 보면 분명히 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영글어진 내가 있을 거니까.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계절은 겨울을 견뎌내고 봄으로 가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