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Sep 29. 2020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지만 몸이 아프면 살고 싶어 진다

나약한 정신을 위한 처방전

무기력감은 호기심을 말살한다


내 뜻대로 풀어지지 않는 인생 열차에 오랫동안 탑승해있다 보면 처음 기차에 탑승했을 때 가지고 있던, 이 기차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어느 정도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걸까? 중간중간 거쳐가는 곳은 어디일까? 바깥 풍경은 어떨까? 같은 호기심들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사람의 우울함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우울함의 늪에서 헤어 나오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일단 뛰어!라는 처방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작은 성취라도 해보라는 의미일 테다. 일단 작은 시도라도 해봐. 너의 굳어버린 생활 루틴을 새로운 루틴으로 다시 짜 보자는 등의 개척자적인 이유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도, 너의 심장이 팔딱거리도록 한 번 힘차게 뛰어봐라. 그럼 네가 갖고 있는 고민거리가 잠시나마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처방임에 분명하다.


고상하게 돌려서 표현했지만 쉽게 말하자면 네가 지금 몸이 안 힘드니까 그런 헛생각이나 하고 있지 개고생 해봐라 그런 생각이 드나!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지만 반대로 육체 역시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치통 때문에 치과를 찾을 때면 치아만큼은 절대로 아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복통 때문에 방구석에서 뒹굴며 한 발자국도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일 때는 복통이 최악의 고통인 것 같다는 생각을, 두통으로 누워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조차 힘들 때에는 두통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악의 고통이라며 각각의 고통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인 것처럼 느낀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21살. 막 재수를 끝내고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여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청춘을 즐기던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말 그대로 당해버렸다. 피할지 말지 고민할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는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신호등을 건너다가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보니 대학병원 응급실이었다.


손가락, 팔, 정강이, 무릎 등 오른쪽 뼈 대부분이 부러지거나 부수어졌다. 머리와 목, 허리를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눈을 떴던 그 순간, 세상 모든 고통이 나에게 몰아닥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괴롭고 고통스러웠지만 그저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낫기만 한다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교회건 성당이건 절이건 어디든 다니겠다며 밤마다 그간 믿지도 않았던 여러 신들에게 기도를 하다 잠이 들었다.

 

2009년 말 신종플루가 유행이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유행처럼 번진다고 해도 질병만큼은 결코 유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던 12월 즈음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일 년째 지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전염병의 무서움을 전 세계가 함께 공유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의 전염병이라는 개념이 사실 잘 체감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한 번 체감해 보라는 절대자의 의도였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개인 방역에 실패한 나의 부주의 때문이었는지 신종플루에 걸려버렸다. 아니 아마도 걸렸던 것 같다.


그 무렵 어느 아침이었다. 눈을 떴는데 몸살감기에 걸렸을 때 느껴봤던 근육통과 오한, 두통 치통의 10배는 될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고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만한 정신도 체력도 짜낼 수가 없었다. 교통사고 이후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벽에 기대어 기어가듯 걸어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병원으로 갔다. 간단한 검사 후 신종플루인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링거를 맞은 뒤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대략 세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경험의 공통점은 극한의 신체적 고통을 경험했고 그 순간만큼은 나의 인생을 통틀어 그 어떤 순간보다도 생에 대한 강한 열망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는 점이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다는 극한의 고통. 그런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예방접종은 균을 희석해서 우리 몸에 투입하는 행위이다. 약한 균을 우리 몸에 미리 들여와 강한 균이 들어왔을 때를 대비하여 내성을 만들어두는 것이 예방접종의 목표이다. 헬스장에 가서 러닝을 뛰며 조여드는 심장을 바라보는 것은 어찌 보면 예방접종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생에 대한 열망과 집착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그 대안으로 헬스장의 러닝 머신이나 간헐적 단식과 같이 희석된 고통을 우리의 일상에 가볍게 주사하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괴로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사람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육체적인 손상 때문인 경우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손상 역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너는 몸뚱이도 멀쩡한 놈이 왜 그리 궁상을 떨고 있느냐며 정신적 곤란함을 겪고 있는 사람의 난처함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언제나 문제는 발생했고 늘 그러했듯이 답을 찾으려는 노력만이 우리에게 웃음이 있는 내일을 선사해 준다는 것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타인의 일상을 응시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