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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Dec 01. 2020

가족의 재구성

힐빌리의 노래, 길버트 그레이프, 왜 그래 풍상 씨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안나 까레리나 -


가족, 이처럼 다양하고도 다양한 이야기를 뿜어낼 수 있는 소재가 또 어디 있을까. "가족"하면 행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다. 안나 까레리나에 나오는 저 유명한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근원에 대해 묻는다면 마치 한 집에서 자란 것처럼 비슷한 대답을 들을 수 있지만 반대로 불행한 가정은 어찌 그토록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이유들이 튀어나오는지 불행의 이유를 목격할 때마다 새롭고 미스터리하다.   


그저 사랑을 주고받으며 마음껏 행복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왜 우리는 불행을, 때로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가.


인간은 분명하게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다. 처한 환경에 따라 개인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인간관계나 세계관이 다르게 형성된다. 경제적 환경, 지리적 환경, 문화적 환경 등이 매우 다양하면서 복잡하게 얽힌 채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간혹 환경을 극복해 내는 개천의 용들도 물론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개천에서 태어나 개천에서 사라져 간다. 환경이라는 것은 그만큼 강대해서 개인의 노력으로 헤쳐나가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어려움을 주는 대부분의 주변 환경이라는 것은 하나같이 극복하기가 어렵지만 그중 최고를 꼽자면 단연코 가족이라는 환경이다.

 

왜 그래 풍상 씨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중장년층을 겨냥한 전형적인 한국형 막장 가족드라마였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족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상, 진상, 정상, 화상, 외상, 노양심, 유흥만, 한심란, 김미련... 등장인물의 이름만 봐도 범상치가 않다. 양심 없는 부모와 진상에 화상인 형제자매들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가족의 전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이란 의자의 다리와 같아서
하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나머지 다리들까지 흔들리는 법이다.


"힐빌리의 노래"와 "길버트 그레이프"같은 영화를 보면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의 굴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선택의 순간마다 괴로움을 느끼며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애증"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방식으로 점차 쌓여가며 단단해지는지 단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불편함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겐 깊은 공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등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문득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고통을 겪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들이 불쌍해서이기도 할 테지만 그보다 더 커다란 감정에 풍덩 빠지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작품 안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영화를 보다가, 책을 보다가, 드라마를 보다가도 우리는 문득 우리의 모습을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는 모습이 행복한 모습으로만 다가온다면 좋겠지만 인생이란 그리 녹록지가 않다.

 

이런 류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가족이고, 나를 힘들게 했던 가족이지만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다. 그런 가족을 나는 이제 이해하고 사랑하려 한다는 교훈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형태의 위로를 건네고 싶다.


애증의 가족 때문에 아직도 가슴에 꺼지지 않은  불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이런 결말을 마주하며 죄책감을 갖게 된다. 나는 아직 가족을 용서하지 못했건만 이런 마음을 품는 내가 나쁜 인간이란 말인가, 내가 입은 피해와 상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저히 용서가 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그런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용서해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용서는 결국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라는 말이 이해는 되지만 진정으로 용서를 건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괜찮다. 꾸역꾸역 끌어안고 살아가다가 더 이상 힘들어 견딜 수 없게 된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는 날이 아마도 오리라 생각한다. 마음껏 사랑하라는 말처럼 마음껏 증오하라는 말도 죄책감을 갖지 않고 동격으로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용서는 권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본인만 선택할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맘껏 울고, 맘껏 미워한 다음에서야 사랑을 이야기해도 결코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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