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Aug 01. 2020

매몰 비용의 덫

내가 그동안 해놓은 게 있는데...

매몰비용 : 의사 결정을 하여 지출한 비용 중
                   회수할 수 없는 비용.


내가 그동안 해놓은 게 있는데...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참으로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내가 그동안 해놓은 게 있는데"라는 생각을 매몰비용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과 함께 반가운 마음이 들어 이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몰"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무언가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이 쏟아지고 틀어 막혀서 도무지 건져낼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는 저 단어는 "내가 이걸 어떻게!!!"라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문장 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매몰비용을 고민한다는 것은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과 같다.

 

 대학을 다닐 당시 "장수생"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재수생, 삼수생을 넘어 4 수생 이상부터 장수생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가 있었다. 또는 수능을 본 횟수와는 상관없이 직장생활이나 다른 활동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사람에게도 "장수생"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두 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장수생들은 엄청난 매몰비용을 감수해내고 대학 입학이라는 선택을 과감하게 감행한 것이다. 이전에 다니던 직장, 이전에 쌓아왔던 스펙,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영역으로 나를 던지기 위해, 회수할 수 없는 자신의 과거의 노력을 눈물을 머금고 손에서 놓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늦은 나이라고 지칭되는, 그 실체 없는 어느 나이 즈음에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을 향해 지금껏 해온 것이 아깝게 왜 그런 선택을 하느냐며 두 팔을 걷어붙이고 뜯어말리는 행동을 하곤 한다. 인생은 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런 결정을 하려는 타인을 보면 걱정할 준비부터 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의 바탕에는 무의식 중에도 매몰비용을 아깝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매몰비용이 기세 등등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뽐내는 영역 중 한 곳은 투자의 영역이다. 비용이라는 용어 자체가 경제의 세계에서 비롯되었듯 매몰비용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와도 같은 이 영역에서 활개를 친다.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그동안 까먹은 돈이 아까워서, 새로운 투자처로 갈아타지 못하고 나의 자산을 묶어두고 마는 행위는 매몰비용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움찔 거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연애나 결혼에 있어서도 이런 못난 생각 때문에 헤어짐의 순간에 스스로 바닥을 드러내고야 마는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지질한 남자가 내뱉는 대표적인 대사 중 하나로 "내가 너한테 쓴 돈이 얼만데"라는 대사를 꼽을 수 있다. 이 한마디의 말로 자신이 그동안 정성스럽게 구축해온 한 사람과의 관계를 오로지 재화로 치환해버림과 동시에, 상대방에게 천민 자본주의의 끝판왕으로 각인되고 마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원망스러운 자식에게 참다 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튀어나와 버리고 마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시리즈라던가 오랫동안 충성을 다해온 회사를 향해 성토하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데!" 시리즈 등이 있다.


우리의 삶을 휘감고 있는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 결국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쏟아부었던 열정과 노력이 아까워서 쉽사리 놓아줄 수 없는 어떤 무엇. 그간의 시간이 허망해질 것 같아 차마 등을 돌릴 수 없는 어떤 것. 다시는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 이런 것이 매몰비용이라고 한다면, 매몰비용 때문에 새로운 선택을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탓하기 전에 그간 열과 성을 다해 살아온 자신에게 박수를 먼저 쳐주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지만 매몰비용에 매몰되어서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새로운 선택지를 선택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매몰비용에서 벗어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지난 나의 선택을 번복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만 하는 진짜 어른의 행동인 것이다.


 아깝더라도, 후회하게 되더라도 매몰비용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우리의 삶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너를 그렇게 키웠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