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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an 21. 2021

나도 너를 그렇게 키웠어

모순의 괴로움

사랑하기에 서운하고, 서운하다 보니 밉고, 미워해서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을 어찌할 바 모르고 보낸다 - 안 느끼한 산문집 -


너무도 미운 사람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대상은 나의 부모님이었다.


철이 들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던 꼬꼬마 시절부터 부모님은 나에게 조화롭지 못한 것이 억지로 함께하게 될 때 발생하는 불편함, 불협화음이 빚어내는 굉음, 결과에 의해 묵살되어 버리는 선한 의도와 과정들, 파괴된 우정과 도피성 체념, 자기 연민의 되새김, 가난에 딸려오는 수모와 불편함 같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 묵묵한 책임의식, 자녀에 대한 신뢰, 독서를 통한 스트레스 승화, 고통에 대한 인내, 꾸준함과 도전정신,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 베풀고 나누고 싶어 하는 자세 같은 것들도 가르쳐주었다.


글로 쓰고 보니 어떻게 이렇게 어울리지 않고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가치들을 동시에 전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만큼 앞 뒤가 맞지 않는 존재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기에 이런 아이러니가 완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원하고 원망하죠라는 에즈원의 노래 가사처럼 평생을 미워하고 미안해했다. 그런 양가감정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고 극단적인 성향을 띄게 만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잘하는 모범생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디 즈음 위치한 미움과 원망이 뒤섞여 틀어진 부분을 기어코 건들고 마는 외부의 파장을 주하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눈알이 돌아가기 일쑤였다. 


식을 낳아 키우다 보니 부모가 자식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볼 때에도 결코 내비칠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기대를 품은 그윽한 눈빛이 된다는 것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어찌 크고 작음이 있으랴. 주어진 가혹한 현실 앞에 사랑이 고개를 들이밀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이미 진작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테다, 다만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어머니와 함께 이제 두 돌이 된 아이의 사진을 바라보고 었다. 말없이 웃으며 사진을 넘기던 나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스쳐 지나가는 듯 한마디를 던졌다.


이뻐 죽겠지? 나도 너를 그렇게 키웠다.


아무리 환경이 인간의 품성과 행동 양식을 좌우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삶의 그늘진 부분들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 반복되며 딱딱하게 굳고 찐득하게 눌어붙어버려 닦아내려 애를 쓰고 애를 써도 잘 닦아지지 않는 갈등의 찌꺼기들은 여전히 허술해 보이는 관계 속에 기어이 들러붙어 존재감을 간간히 과시하곤 한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내 안에 팽팽하게 당기어져 존재하는 인내심 비슷한 어떤 것이 끊어져버리는 느낌, 서서히 술에 취해갈 때 점점 시야가 좁아져 내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고 주변의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어간다.


고되고 피곤한 화해의 시도와 안락하면서 불편한 회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흘러가는 세월에 기대어 마음속에 응어리들이 녹아내리기만을 어제도 오늘도 바랬고 바란다.


녹고 굳기를 반복하는 양초가 제 모양을 점차 잃어가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도 너를 그렇게 키웠다는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쉽게 불붙고, 동시에 녹아내리는 가슴이 나는 그래서 때때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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