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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an 04. 2021

한 사람의 세월을 함께하다

역사는 힘이 세다

세월을 함께 보내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어느 배우에게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에 눈길이 간다거나,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표정이 마음에 드는 것과 같이 아주 주관적이며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는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이성에게 궁금증을 품듯 그 배우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배우의 커리어를 주욱 살피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 제목을 들어봤다거나, 내가 좋아했던 영화에 출연한 흔적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하나하나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보게 된다. 


배우의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 오십 대의 서로 다른 모습들이 담겨있는 세월의 흔적을 가만히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면 일면식도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 팬심이라기엔 왠지 가볍고 좋아한다고 하기엔 약간 쑥스러운 호감 비슷한 감정이 서서히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젊은 날에 풋풋함이 남아있는 앳된 소녀의 모습으로 첫사랑과 순정을 표현하던 배우가 세월의 연륜이 담긴 관능과 모성의 형상을 눈빛 하나, 손짓 하나로 표현해내는 배우로 변화해가는 순간을 지켜보며 문득 시간을 초월하여 그 사람의 곁을 지키며 한 사람이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압축하여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 사람이 풍기는 기운이 변해가는 것을 이토록 짧은 시간에 몰입감 있게 목격할 수 있는 매개체로 영화 말고 다른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최신의 영화를 보다가 어느 배우에게 매료되어 시기적으로 그 배우의 가까운 전작들부터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엔 배우의 시간을 거꾸로 되감아가며 마주하게 된다. 원숙하고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는 대 배우의 모습은 아직 수줍음을 덜어내지 못한 약간의 어색함이 남아있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다. '이럴 때도 있었구나. 그 굉장한 배우에게도 이렇게 촌스럽고 어색한 시절이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과거를 나 혼자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친구가 편하고 소중한 이유는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함께 보냈었고 현재에도 함께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내 곁에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어떤 믿음 따위가 편안한 관계를 유지시켜주고 그 안에서 깊은 풍미를 자아내도록 만든다.


배우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친구를 사귀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라 신비롭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배우의 시간을 나 혼자 멋대로 품어대다가 그와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착각에 빠져버리고 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다 보니 그저 잘생기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보다는 오랫동안 자신의 역사를 쌓아온 배우에게 더욱 매료되는  같다. 그 역사는 때때로 배우 본인에겐 지워내고 싶은 흑역사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이 켜켜이 쌓여 그의 현재를 더욱 빛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변신으로 대중에게 늘 새롭게 다가서려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우직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구축해서 주야장천 비슷한 역할을 맡으며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은 그 배우 말고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해당 영역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둘은 분명 다르지만 꾸준하다는 측면에서 호감이 간다.


결국은 꾸준함이다.


배우에게 빠지는 이유 역시도 차곡차곡 쌓인 꾸준함 때문인 것을 보며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커리어적인 도움, 기능의 숙달과 같은 실질적인 기술의 향상을 돕는 것을 넘어선 어떤 매력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꾸준한 사람은 매력적이다. 그 자체로 한 사람이 풍기는 매력이 되어버린다. 묵묵하고 성실한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던 어느 배우에게 내가 빠져들었듯, 우리는 꾸준함 속에 성장해나가는 어떤 대상에게 언제나 마음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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