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공포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미지의 것과 확정된 것.

by 정 호
청년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뉴스를 통해 기쁜 소식을 접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뉴스의 목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정보 전달을 핑계 삼아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뉴스는 불안과 공포의 집합체가 되었다.


잘 팔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무리 상업의 기본이라고 할지라도 매체에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청년들의 불안과 공포를 팔아댄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둘러본다 한들, 우리나라 청년들만큼 불안에 떠는 세대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갖 이유로 불안에 떠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하고 있다.


청년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이미 술안주와 가십거리로 충분히 소비되고 있는 상황이니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이 아니더라도 세대와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은 언제나 불안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였다. 유한한 존재이면서 욕망을 완벽히 없애기 힘든 존재이기에 앞으로도 인간은 여전히 불안을 등에 업은 채 생의 목적지까지 걸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안에 떠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가.


청소년들이 장래 직업선호도 1순위로 공무원을 꼽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도 더 지난 것 같다. 보장되지 않는 밥벌이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던 시기였기에 나 역시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시나브로 안정성을 가장 우선의 가치로 여기게 되지는 않았을까. 결정되지 않은 미래나 무엇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 속에 불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며 존재감을 발휘하려 하는 것은 미지의 것을 마주할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생존본능 일지도 모른다.


임용을 공부할 때 매일이 불안했다. 수능을 준비할 때는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는데 1년에 한 번 밖에 치를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임용을

공부할 땐 매일같이 불안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도 수능과 임용의 차이는 선택의 유무에 있었던 것 같다. 수능은 점수에 상관없이 어딘가는 선택을 해서 갈 수 있는, 다시 말해 플랜 B, 플랜 c를 고려할 수 있는 시험이지만 임용은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명확한 답이 준비되어 있는 시험이었고 만약 불합격을 하게 된다면 끔찍한 생활을 1년 더 반복해야 한다. 자칫했다간 1년이 아니라 수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정해진 기한 없이 이 짓을 또 해야 된다는 압박감, 그것이 가장 큰 불안의 원인이었다.


떨어진 뒤의 상황을 이것저것 그려본다. 열이 뻗칠 것이고 연애도 못할 것이며, 친구들과 비교하는 못난 마음이 생길 것이고 일 년 간 돈을 벌지 못하여 여러 가지 기회비용을 날리게 될 것이며 부모님의 속이 상할 것이고, 떨어진 졸업생들은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그렇게 될까 싶은 생각도 들고, 군대도 1년 늦춰질 것이고 결혼도 늦어질 것이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합격하게 된다면 결코 실제 하지 않을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험에 떨어지게 되는 순간 불안은 공포로 바뀐다. 상상하던 일들, 막연히 그려냈던 것들이 실체화되어 나의 삶에 침투해 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불안이 현실화되는 순간, 공포는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한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압도적인 두려움으로 뒤바뀐다.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었던 순간의 허상들은 내 두 손과 두 발을 묶는 현실의 족쇄로 탈바꿈한다. 실제 임용을 한 번 떨어졌었고 패닉에서 벗어나는데 삼 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불안의 대상은 실체가 없거나 희미하다. 막연한 두려움이다. 불안은 머뭇거리는 순간 고개를 내민다. 잘 안되면 어쩌지, 실패하면 어쩌지, 비웃음 거리가 되면 어쩌지, 늦은 건 아닐까,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틀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늘 불안하다.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이다. 행동하는 순간 우리는 불안을 인지하지 못한다.


불안과는 달리 공포에는 실체가 명확히 존재한다. 실패해 버렸다.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늦었다. 틀렸다. 두려움의 존재를 확신해 버렸다.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명확하게 내 앞에 서있다. 우리는 그 순간 절망을 느낀다.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구분지어야 한다. 그리고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당장 하는 수밖에 없다. 정신없이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불안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때때로 공포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불안 때문에 하루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행동 말고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불안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어떤 대상 때문에 피어나는 감정이고 그 감정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들여다보게 해 준다. 즉 실체를 인지하게 해 준다는 뜻인데 이것이 글쓰기를 치유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글로 형상을 갖춘 불안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이 아닌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악할 수 있다면 그다음 스텝을 밟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이야기했던 청년들의 불안은 어쩌면 더 이상 불안이 아니라 공포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불안이 공포로 바뀌어 내 삶을 망가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불안은 불안에서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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