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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Mar 20. 2021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

있다고 한들 의미가 없다

살다 보니 점점 상대주의자가 되어간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나의 동공은 꽃잎을 따라 정신없이 상하좌우로 흔들린다.

어린 날엔 별다른 생각도 신념도 없었으면서 알량한 정신세계를 왜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고 다녔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식하고도 호기로운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는 매년 말, 학교의 철학과 신념을 세우는 시간을 갖는다. 철학과 신념에 따라 다음 연도 학교 운영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조직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조직이 아닌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것은 유효하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테지만 어째 세월이 갈수록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점점 더 흐려지고 지워져 가는 것만 같다.


어떤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할 때면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응답하는 친구에게 나는 언제나 "모두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 이 회색분자 같은 놈"이라며 선택을 종용했다.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제발 그러지 말라고 뒤통수를 한대 세게 후리고 싶다.


내 생각을 바로 세워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은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멋진 삶으로 표출되어 존경과 우러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무엇보다 내 생각이라는 것이 항상 옳다는 확신이 없다. 그리고 반대의 생각과 부딪혔을 때 강하게 반박할 수 있을 정도로 평상시 견고하게 나의 생각을 다듬어 두는 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라는 식의 상대주의를 표방한 맹탕맹탕한 생각에 젖어드는 것만 같다.


칸트는 마땅히 따라야 할 정언명령에 대해 이야기했고 리스토텔레스는 절대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몽테뉴는 죽음을 이야기하며 인간은 죽음을 인지하며 유한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 있다고 말했다.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말하며 무수히 많은 자신의 이상과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조차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디엔가 존재한다. 종교조차 사람에 따라 다른 믿음을 선택하는데 철학자의 생각 따위에 전 세계인이 동의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설령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존재가 인간인 이상 결코 절대선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내 오늘 밤 수면 시간을 걸어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모두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절대선을 찾는 은 무의미하다. 설령 그것을 어렵사리 찾아내어 나의 신념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들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어디에선가 다른 사람이 선택한 절대 선과 부딪히게 된다.


부딪혀 깨지고 부서지는 정을 단련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정을 극복해 냈을 때에만 고된 과정은 단련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극복해내지 못하고 터지고 깨지다가 결국 스러져버리고 마는 무수한 사람들에겐 이상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는 것을 아무리 보편 진리라고 우긴 들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런들 흥, 저런들 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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