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득은 느리고 망각은 빨라서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

by 정 호
아.. 이것 분명히 전에 어디서 봤던 내용인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스쳐 지나가며 마주했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려 아등바등 애를 써보곤 하지만, 서리에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풀잎처럼 나의 기억과 가슴속에 잠시 담아두었던 짧은 지식과 아름다웠던 장면들은 힘없이 소리 없이 희미해져 간다.


읽고 또 읽어본다. 기억하고 다시 기억하려 애를 써본다. 좋지 않은 머리 탓인지 융통성 없는 성격 탓인지, 원체 습득이 늦는 탓에 뭐든 남들보다 한번 더 보고, 두 번 더 반복해야 남들 하는 만큼이나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공부 머리도 일 머리도 그리 민첩하지 못하여 빠릿하게 핵심을 파악해서 요점을 처리해 나가는 친구들을 옆에서 바라볼 때면 신기하고 부러운 마음에 멍하니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엔 무엇이든 그저 열심히만 하면 다 잘 되리라 생각했었다. 요령도 없고 경험도 없는 사람이 눈앞에 마주한 벽을 부숴내기 위해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란 그저 쉬지 않고 망치로 때리고 또 때리는 것,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을 떠올리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춤을 출 때도 그랬다. 남들은 서너 번 보면 금세 비슷하게나마 따라 추는 동작이 내 눈에는 도무지 보이질 않아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저 내 눈에 동작이 들어올 때까지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학원을 다닐 때도 그랬다.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교수님의 가르침을 한두 번 듣고 바로 이해하여 실행시키는 동기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자괴감과 무기력함에 빠져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부러웠다, 같은 시간을 투입하고도 월등한 결과물을 내어놓는 친구들이. 억울했다, 같은 수준의 결과를 내어놓으려면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했던 부족한 내 재능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결국 비슷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을 때는 "그래도 하니까 어떻게든 되기는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시간을 많이 들여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의 욕망이 닿아 있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그것에 기어코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버리는 순간이면, 그곳은 곧 지옥이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느린 덕에 남들보다 배움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더욱 달콤한 성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에 동의한다. 실제로 오랜 기다림 끝에 이뤄낸 것들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희열을 느끼게 해 주었으니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하지만 학습의 영역에 있어서 만큼은 저주에 가깝다.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마다 느낀다. 아 나는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구나. 같은 개념도 비슷한 내용도 분명 어딘가에서 보았었는데, 심지어는 내가 이것을 머릿속에 담아두기 위해 끙끙대며 노력했던 기억이 분명히 있는데... 다시 보니 거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느끼는 스스로가 비루하게 느껴져 솟아오르는 짜증을 누르기가 어렵다.


첫 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처럼, 사랑했던 애인을 다음 날이면 깨끗이 잊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황홀함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경험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을 텐데, 명확했던 기억들은 사라지고 아스라이 얼마 남지 않은 잔향만을 희미하게 손에 쥔 채 다시 배운 것을 또 다지고 다지는 모습이란...


습득이 망각의 속도보다 빨랐다면, 혹은 망각의 속도가 조금 더 느렸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고 무기력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배우고 익혀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 배우고 익히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욕심을 버리고 자기만족 삼아 배우는 공부라면 만족할 수 있을까.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무엇인가.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닌 배워서 어딘가에 써먹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가. 써먹지 못하는 공부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도대체 책은 왜 읽는 것인가.


암기 위주의 교육을 거부한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하지만 사실 모든 창의력과 새로운 도전은 기존의 것을 수정, 보완, 종합하는 과정 뒤에 따라온다. 필연적으로 기존의 것들을 쌓아두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수업도 그렇고 글 쓰는 일도 그렇고 살아가는 모든 일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있어야 거기에 이것도 보태보고 저것도 보태보며 무수한 분해와 결합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이놈의 망각은 속도가 너무도 빨라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는 커녕, 해봤던 것, 알고 있는 것을 붙잡아두기에도 버겁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부럽다는 말을 참 길게도 써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