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도 기대도 모두 부질없는 것
살다 보면 남에게 과도한 기대를 내 멋대로 던져놓고 기대에 상응하는 결과가 돌아오지 않아 서운할 때가 있다.
한창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의 관계와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1순위였던 시절이 있었다. 애완 강아지마냥 사람을 좋아해 그저 부르면 부르는 대로, 부르지 않으면 내가 졸졸졸 쫓아다니며 문어발식 인간관계에 탐닉하던 시절이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종교적 믿음이 갑자기 생기는 것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그것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과론의 법칙을 따를 때가 더 많아 보인다. 그리하여 내가 왜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에 집착하고 과도한 기대를 부여하며 나 혼자 기뻐하고 나 혼자 실망했던 때가 많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심리학에서는 어떠한 결핍 때문이라고 답을 찾는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특정한 시기를 함께 보냈다는 이유로,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뛰었던 추억을 이유로, 삶의 궤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고 애정하며, 안타깝지만 자연스럽게도 기대라는 마음을 품게 된다.
타인에게 기대를 품는 것은
복권을 사는 것과 같다.
복권은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다. 아니 도대체 당첨이 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의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아주 작은 기대감에 내 지갑 속의 오천 원, 만 원을 툭툭 털어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어보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게임에 참여한다.
혹자는 적은 비용으로 내일의 희망을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감을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은 도박에 지속적으로 비용과 마음을 쏟는 일은 언젠가 자기 파괴나 더욱더 커다란 절망을 가져올 것처럼 보여 우려스럽기도 하다.
타인에게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복권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기대를 한껏 해보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문득 느끼게 되었을 때, 한없이 밀려오는 서운함과 실망감을 표 나지 않게 감추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듯 우리는 친구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서운하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그만큼 마음을 주었기 때문일 때가 많다. 내가 준 마음이 크면 클수록 서운함의 강도 역시 커질 확률이 높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내 멋대로 어떤 한 인간에게서 존경이나 대견함 애틋함을 느껴버리는 탓에 그 사람을 애정하게 되고 그 애정은 부지불식간에 슬픈 결말을 예고하는 기대라는 덫을 기어코 잉태하고야 만다.
기대하지 말자, 마음을 비우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찌 제거하고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 기대감을 나에게로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타인을 내 마음과 내 기준에 맞출 수는 없다. 나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 타인에게 실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을 에너지를 내 안으로 쏟아부어 나에게 기대를 품는 일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나에게 기대하는 일은
적금을 드는 것과 같다
적금은 원금을 보장한다. 반드시 되돌아온다. 나에게 기대를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나에게 기대하는 나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것이 작심삼일은커녕 작심 세 시간이 될지라도 기대하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나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 옛 노트에서
바람이 풀밭을 스치는 소리만 들어도 이 세계의 바깥까지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수런댐 속을 살아가며 수많은 마주침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내 안에 기대와 그리움이라는 달콤하지만 혼란스러운 씨앗을 심어두었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앵두가 익어가는 시간이 온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것도 그립지도 실망스럽지도 않은 시간이 되리라.
내 안으로 익어 들어가는 일,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기대를 품으며 더욱 멋진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일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일인가. 아무것도 그립지 않고 어느 것에도 실망하지 않는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 그러한 삶에 언젠가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아름다운 꿈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