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라는 말이 참으로 무색하게도, 요 며칠 동안 청명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고 푸르른 날들이 이어졌다.
날씨는 마음을 흔들어대는 힘이 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괜스레 마음까지 싱그러워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알록달록 간지러운 색감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세상과 마주하고 싶어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어 진다.
장마철이면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다 내 마음의 어느 한 부분도 함께 쏟아져내리는 것 같은 감정에 빠져 장마가 끝나고 땡볕의 더위가 시작되기 전까지 짧은 사춘기를 한번 더 겪는 것처럼 설익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다가도 이내 이런 미성숙함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부끄러운 나머지 서둘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도 한다.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내리쬐는 태양의 고열은 너무도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탓에 나까지 덩달아 젊어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젊은과 빛남이 언제나 동등한 위치에서 빛을 발하는 단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밝은 빛을 뿜어대는 계절에서 젊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처럼 날씨는 우리의 감정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며 우리의 마음과 기분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연중 비 오는 날이 많은 영국이 자살률이 높더라는 말의 통계수치를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는, 날씨가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여행을 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문화유적을 둘러보며 인류 역사의 위대함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도 있을 테고,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객도 있을 것이며, 축구나 명품처럼 그 지역에서만 오롯이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소비 혹은 경험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요즘같이 청량하고 푸르른 하늘을 마주하게 될 때면 오롯이 날씨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어딘가 하나쯤은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계절 변덕이 심하며 추운 겨울과 습하고 더운 여름을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지중해풍 기후라서 따듯하고 온화한 날씨라거나 무역풍의 영향을 받아 습하지 않고 선선한 날씨라는 등의 표현은, 가히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 댄 것처럼, 우리 상상 속에 천국의 한 장면과도 같은 신성함을 품은 이상향으로 다가와 그런 날씨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어버린다.
여행을 하려면 식비 교통비 숙박비처럼 필수적으로 소모되는 비용이 있다. 하지만 이런 필수적 비용을 소모하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다. 먹고, 자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것은 여행의 과정에서 누리는 즐거움이지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되기에는 무언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지워내기 힘들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조차 많이 다녀봤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누군가 나에게 여행을 왜 다녔느냐 묻는다면 날씨가 주는 즐거움을 즐기러 다녔노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여행의 비용 안에는 날씨 비용도 포함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 지역, 그 장소, 그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날씨와 풍경, 공식적으로 누군가에게 지불되어야 하는 형식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행 비용 안에 날씨 비용이라는 비공식적 지출이 포함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날씨를 살 수만 있다면 이렇게 화창한 날을 기꺼이 사두고 싶다. 그리고는 고이 간직해 둔 화창한 날을 한 번씩 꺼내어 두고 가만히 바라보며 세상의 온갖 기쁨이 담겨있는 것만 같은 그 순간을 품에 꼬옥 안고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