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원하는 것을 거의 모두 찾을 수 있는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점을 고를 때 구글과 네이버 혹은 맛집 카페나 인스타그램 등 각자에게 친근한 플랫폼을 이용해 맛집을 찾아 나선다. 유행하는 옷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 힙한 스타일은 무엇인지, 스타들이 애정하는 브랜드는 어느 것인지 찾기 위해 인스타 피드와 각종 커뮤니티를 훑어본다. 놀러 갈 장소를 찾을 때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통해 여름에 꼭 방문해야 할 국내 여행지 best 50과 같은 카드 뉴스 형태의 홍보성 자료들을 훑으며 장소의 범위를 줄여나간다.
이런 종류의 선택지를 고르는 행위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거의 대부분 스마트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대부분 소비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을 검색하는가. 우리가 검색하는 것들은 음식, 옷, 여행지뿐만이 아니다.집과 job을 구할 때에도,차를 살 때에도, 이불 커버 하나를 고를 때에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 사이를 배회하느라 진이 빠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넓어진 선택지 때문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소비에 있어서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종교적 깨달음을 갈망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전 같았으면 근처에 사는 스승에게 배우거나 기껏해야 서울에 유명하다는 어느 명망 있는 유명인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면 그만이었을 테다. 배우는 과정이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둘째 치더라도 어느 스승에게 배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스승의 존재가 몇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것은 마케팅의 일종이며 유명할수록, 자신감이 있어 "보일"수록 고객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성공을(실제로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과시하는 프리랜서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은 부자가 아닐지라도 그들의 자랑을 미끼 삼아 그들이 언젠가 진짜 부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현명하고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달리 보면 사기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종교적 구원, 철학적 깨달음을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정신적 지주를 찾아 헤매는 선량한 소시민들은 무소유를 실천해야 할 종교인의 풀 소유를 바라보며 허탈해하고, 금욕적이고 대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할 자리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행동을 실천하며 개인의 사리사욕에 탐닉하는 것을 바라보며 분노한다.
인간관계도 자꾸만 늘어간다. 단톡방의 개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가며 읽지 못하고 넘기는 글이 많아질수록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마음에 "티 안 나게 단톡방을 나오는 법"따위를 검색한다. 진짜 관계, 깊은 관계를 고민하며 공허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끔씩 가지치기를 해보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늘어가는 단체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4지 선다형에서 40지 선다형으로
선택지가 다양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연스러운 경쟁을 통해 공급자들의 퀄리티가 향상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려 최대의 만족감을 얻어낼 수 있는 선순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보다 확실한 행복은없으며 이는 바람직해 보이기까지 한다.
문제는 선택지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점이다. 선택지가 많아서 골머리가 아픈 상황은 단순히 소비적인 차원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연인이 되거나 특별한 풍파를 겪지 않는 이상 나의 모든 것은 거의 대부분 확장하게 된다. 게다가 관성이라는 것은 삶에도 적용이 되어 확장은 점점 더 큰 확장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의 범위, 경제력, 지식, 영향력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확장되며 그로 인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은 그저 좋기만 한 일일까?
한계용량을 초과하는, 말 그대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의 범주를 넘어서 무한에 가까워진 선택지 사이를 맴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최선의 행복을 고르기도 전에 탈진 상태에 빠져버리고만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시대가된 것 같아 어지러울 때가 있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는 일렁임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현기증이 난다.
평생을 주택에서 살던 사람에게 70층 아파트에 가서 살아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현기증을 느끼며 제대로 잠에 들지도 못할 것이다. 평생 규정속도 80km를 넘지 않는 속도로만 운전해온 사람에게 200km의 슈퍼카 보조석에 앉아보라고 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테다.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 급하게 흔들리는 배 위에 있을 때 우리의 뇌와 장기는 출렁임을 느끼며 멀미와 구토의 신호를 보낸다. 급하게 변화하는 환경은 정신적 멀미를 유발한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은 육체적 멀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이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몰려올 때 구토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이 되었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적응기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일정한 강도로 서서히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충격은 최소화되고 그 사이에 변화하는 환경을 흡수하며 적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답은 내 안에 있는 법이다. 커다란 배는 잔파도에 출렁이지 않는다. 큰 사람 역시 잔 진동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를 현혹시키는 것들로부터 단단해지는 일은 그래서 외부의 충격과 변화로부터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내기 위한 그 어떤 종류의 일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릇이 커지면 커질수록 멀미를 하지 않게 되고 적응도 쉽게 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