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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포노 사피엔스 학교의 탄생

격변의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움직일 것인가

by 정 호
명함은 한 사람의 말에 권위를 부여한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패스한 뒤 교육부에서 25년간 일했다는 작가의 화려한 스펙은 그의 말에 쉽사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만큼 배웠고 그 정도로 똑똑하고 그만한 높은 자리에서 일했던 사람이 하는 말이 과연 틀릴 수 있는 것일까? 모두 다 맞는 말은 아닐까? 그 사람보다 학력도 경력도 짧은 일개 교사의 생각이 감히 이런 대단한 사람의 책에 대해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서평을 쓰기에 앞서 이런 두려움들이 먼저 찾아와 쉽사리 어떤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요즘은 조금 희석된 것 같기는 하지만 사실 분야를 막론하고 책이라는 것에는 이미 일정량의 권위가 포함되어 있어 어떤 책을 읽고 나의 생각과 다른 부분을 말한다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게다가 해당 분야가 나의 전공과 맞닿아 있을 때는 더욱 어렵다. 나의 짧은 견해가 내 전공에 대한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그렇고, 그것은 곧 나의 존재 이유 중 하나에 금을 긋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부족한 생각이나마 몇 자 적어본다.


책을 읽을 때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추천사가 있으면 공을 들여 읽는 편이다. 추천인의 이력을 통해 작가가 하고픈 말의 정당성을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천사를 읽으며 이미 이 책의 본질과는 조금 어긋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대적 시스템의 총아인 기존의 학교 구조를 탈피해야 한다고, 모든 본질적인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급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이 무려 서울대학교 교수라니, 이 아이러니함을 어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잠시 허공을 바라보게 다. 국가 교육과정에서 출발해서 교과서라는 수도관을 따라 대학수능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완성되는 시스템이 우리의 교육을 망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것의 최대 수혜자이자 그 시스템을 가장 공고하게 만드는 서울대라는 곳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기득권 안에 있으면서 기득권을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내부 총질이라는 이유로 돌팔매를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외침이 진정성과 힘을 얻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내려 놓을때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안전한 곳에 포근하게 안착해 있는 상태로 말로만 부르짖는 정의와 이상은 힘이 없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서 헤매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이면 등대를 따라 똑바로 나아가려 애쓰기 마련이다. 오래도록 바다에서 헤매며 배멀미와 배고픔에 시달린 선장은 등대를 발견한 순간 허겁지겁 등대를 향해 나아가기 바쁘다. 하지만 바다는 평온하지 않다. 파도도 치고 거센 바람도 불고 보이지 않는 빙산도 숨어있는 법이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등대만 바라보고 달리다가는 멀미와 침몰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운이 좋아 등대에 도달한다고 한들, 그보다 안전하고 짧은 거리로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늦게서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스마트폰을 마치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선장이 발견한 등대처럼 인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마트폰은 유용하다. 대단한 발명품이자 위대한 도구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도구는 결국 도구일 뿐이다. 도구를 다루는 사람의 활용 능력, 절제력, 응용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스마트폰도 그저 그런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마치 한글이라는 새로운 도구가 생겼으니 모든 것이 혁신적으로 변화할 것이고 한글만 배우고 익히면 기존에 한자 위에 세워진 모든 문명과 지혜들은 쓸모없는 것들이며 하루라도 빨리 갈아엎어야 할 구시대적 유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진정 그러한가. 새 시대로 나아간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바탕 삼아 새로운 것과 융합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기존의 것은 깡그리 틀렸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변혁할 수 있는 것은 진정 존재할 수 있는가.


의도는 충분히 선하다. 학생과 인간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 바탕이 되어 나오는 주장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근대학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왜 자꾸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덟 살짜리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시간 동안 수업을 듣고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다 들은 다음에 말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회적 규칙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 열 살 된 아이들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고안하고 결과를 도출해내기까지 걸리는 모든 과정에 필요한 자기 조절 능력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 기본 능력이 뒷받침된 다음에서야 도구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칼이 아무리 날카로워봐야 손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변화를 위한 외침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무엇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30년 뒤, 100년 뒤를 상상해보자고 외치는 작가의 방패 설정이 이해가 된다. 시간적 거리를 멀리 둠으로써 자기 검열에서 최대한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싶다는 의지도, 그로 인해 다양한 의견의 교류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정의롭고 따듯하다. 그래서 자꾸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다. 어쩌면 세상은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교육개혁을 외치며 선진국형 교육과정을 따라가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책을 보면 유럽의 선진국들의 교육과정 체계나 시스템을 따라가자는 말을 많이 하는데 독서량이 부족한 탓에 그것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풀어내는 책을 아직까지 접해보질 못했다. 학생중심 교육, 개별화 교육,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스스로 설정하고 진행하는 프로젝트 학습, 토의토론 수업 이런 식의 수업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것들은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도 이미 진행하고 있는 수업 방식이다.


이런 수업 방식에 대한 내용도 좋지만 조금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소위 교육 선진국이라 불리는 핀란드 덴마크 북유럽의 교육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실제적으로 학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다루는 대중 서적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혹시 그런 책을 알고 계신 구독자분이 계시다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대중서적은 말 그대로 대중을 위한 책이다. 저자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을 사람들이 널리 알기를 바란다면 최대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야 한다. 논문에나 나올 법한 문체를 사용하거나 식자들만 접하고 해석할 수 있는 원문으로 발행된 책을 어렵사리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감당할만한 일반 독자는 없다. 그것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제발 그런 사례를 자세하게 풀어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교육개혁을 외치는 책을 읽다 보면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단순히 어느 선진국을 본받아야 한다거나 따라가야 한다는 외침과 주장,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있을 뿐 모델링을 해야 할 나라의 국가적 시스템과 체계가 어떤지, 입시제도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교사는 실제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일 년의 커리큘럼은 어떻게 짜여 있는지, 커리큘럼을 짜는 데 있어 제약은 없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어찌 따라 할 수 있을까. 학생중심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도제식 시스템이나 개별화 시스템으로 학생중심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공허하다.


미국과 유럽에 사교육이 없는 이유는 학교에서 배울 내용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교사가 모든 것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선행학습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생물에서 세포를 배울 때 한국은 나선형 학습 구조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울 내용들이 정해져 있지만 유럽과 미국은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고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이 중요하고 이것은 교사가 개별적으로 준비하므로 사교육으로 대비할 수 없다고 말한다.


헌데 미국은 정말 교육 선진국이 맞는가 의문이 든다. 각국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및 흥미도, 사회 관심도, 기여도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성취도를 말할 때 근거 자료로 사용되는 PISA 결과를 보면 미국의 기초학력 미도달 학생 비율은 선진국 국가들 가운데 꽤 높다. 우리나라 역시 높은 성취율 대비 호기심과 흥미도는 낮고 자살률은 높아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교육이라는 슬픈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지만 기초 문해력이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떨어지고 잘하는 사람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기회와 보상을 획득하여 살아남을 수 있지만 못하는 사람들은 한없이 추락하는 미국 교육을 두고 과연 교육 선진국이라 지칭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교육의 결과에 있어서 양극화가 어느 나라보다 심하게 드러나는 나라는 아닐까?


방향성은 알겠다. 이것은 비율의 이야기일 테다. 내용 전달식 교육보다 자발적 토론이 바탕이 되는 실험실습식 수업이 더 효과적이고 의미 있고 학생들의 흥미를 고려할 수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여 그것은 산업사회를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접어든 세상을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며 이것은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이상의 세계를 가져올 것이라는 청사진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문제가 되는 지점을 고치면 될 일이지 잘하고 있는 점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불행을 감소시키는 일은 행복을 깎아내리는 일로 달성할 수 없다.


정말 한국은 단순히 주입식 교육만 하는가? 토론식 수업은 만능열쇠인가? 미국의 기초학력 수준이 처참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점이 되지 않는가. 기초학력 수준조차 도달해있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자발적 토론 실습수업은 과연 가능한가. 흥미위주의 교육은 늘 옳은가. 아이들의 흥미는 늘 옳은 방향으로 뻗어나가는가. 이것은 데리고 갈 사람만 데리고 가겠다는 말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작가의 주장대로라면 선진국형 교육을 실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조금씩 할 줄 아는 평균적 집오리형 인재를 벗어나 새는 새처럼 코끼리는 코끼리처럼 살아갈 방법을 찾아줄 수 있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소 돼지 말들은 최소한의 자립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도 있다.


궁금하다. 네트워크 지식 정보에 기반하여 개별화되고 개인화된 학습 시스템을 통해 지식과 정보 활용 역량을 키운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단순히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패드로 검색해서 혼자 공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그래서 학교로 자꾸 패드를 던져주는 것인가? 디지털 네트워크 학교란 무엇이고 근대적 학교체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학교, 현대적 교육 시스템이 추구하는 바는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이며 구체적인 방안이 대체 무엇인가. 이는 마치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처럼 당위적이고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친구들끼리 잘 지내기 위해서는 배려도 해야 하고 친구의 입장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며 자존감도 있어야 한다. 그저 잘 지내야 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잘 지내게 만들 수 없다.


이론가는 결과물과 지향점을 바라보고 실무자는 과정과 문제점을 살핀다. 행시를 패스하고 교육부 관료로써 근무해온 저자는 명백한 이론가다. 그가 주장하는 이상과 미래지향적 발언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장에서 학생들과 마주하고 있는 실무자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보다 갸웃거리게 될 때가 많은 이유가 단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닫힌 체제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이기 때문일까?


핸드폰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학교는 요즘 많지 않다. 아침에 폰을 강제 압수하고 깜지를 쓰게 하여 학습을 진행하는 교사를 발령받은 이후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학생인권이 그 무엇보다 강조되는 요즘 시대의 학교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는 느낌을 지워내기 힘들다.


이상을 향하고 있는 말들은 언제나 듣기 좋다. 다만 공허할 때가 많다. 근본적인 이유를 건드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해결책은 잠시 이슈가 되었다 사그라들 뿐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 관련 문제의 시작은 학벌이다. 서울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기존 대학의 서열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 논의되지 않는 이상 다른 모든 방법과 논의는 나름의 의미는 있겠으나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변화는 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되어있다. 인간은 본디 손실을 두려워하고 안전을 추구하며 욕망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옳다고 부르짖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다. 그래서 세상은 바뀌기 힘들다.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니까. 소수가 세상을 바꾸는 파장을 일으키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외침이 하나 둘 모여 세상이 조금씩 나은 쪽으로 변화해 온 것은 사실이다. 나를 비롯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밝은 쪽을 바라보고 바라본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면 변화의 속도는 조금 더 빨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과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 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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