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알 수 없기에 살아갈 수 있다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

by 정 호
인간은 늘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한다.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려 할 테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은 찾아온다. 특히 힘든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앞으로는 좋아지는지, 아니면 여전히 힘듦이 지속될 것인지 크게 궁금해하고 그 궁금함은 궁금함을 넘어 생존과 직결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좌절을 경험해온 사람에게 앞으로도 희망이 없을 거란 예언은 생을 이어나가길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가혹한 저주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래서 고민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불행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일수록, 미래를 알고자 여러 방법을 찾아다니게 된다.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거나 철학관에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며, 표정과 말투 같은 삶의 흔적으로 찾아낸 현재의 결과에 기대어 미래를 예측해 불행을 피해 가고자 애쓴다.


혈액형이나 MBTI, 애니어그램, 다중지능검사와 같은 각종 성격검사, 지능검사도 어쩌면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자신을 파악하고,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좇아가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자아발견 운동은 분명 긍정적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아이들의 성장에 관여하는 여러 요인중 타고난 기질적 요인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 진단도구들을 배워 교육적 목적에 맞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도구들이 진단, 대처, 피드백의 과정을 거쳐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타고난 정보들을 파악해 학생의 앞날에 닥쳐올 외부 환경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도움을 주기 위해 활용된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이 역시 최대한 미래를 예측해 불행을 피하고 적절한 선택지를 제공해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테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모두 미래를 몰라 불안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미래를 알게 된다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우리가 가장 알고 싶은 자신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다음 주 로또 당첨번호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대략 범주를 좁혀보면 아마도 성공(돈, 명예, 배우자, 자녀 등)과 실패(죽음, 건강, 실직 등) 일 것이다


두려움의 끝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두려움의 끝이 늘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공포와 고통은 삶의 원초적 근원이며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느끼게 되는 두려움이자 생존 시스템이다. 공포와 고통 때문에 인간은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며 그것은 진화와 발전을 낳는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칼처럼 늘 인간을 괴롭힌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녀와 배우자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돈이 사라지게 되면, 이혼을 하게 된다면, 직장을 잃게 된다면, 암에 걸린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이런 생각들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내 삶의 일정 부분을 파괴, 혹은 파멸을 가져올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 비슷한 문턱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을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을 필두로 한 온갖 종류의 두려움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 미래에 대해 알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불어넣는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인 죽음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자신이 언제 죽는지 알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게 될 것인가.


죽음을 앞둔 수많은 영화들 중 아름다운 영화로 꼽히는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름다운 정리"로 요약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남겨질 사람들이 놀라 허둥거리지 않게 사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혼자 정리하는 주인공의 모습, 평생 끌어안고 살아온 죄책감의 원인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현실적인 문제로 미루어두었던 자신만을 위한 시간. 이런 것들이 시한부 인생을 다루는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테마다.


그렇다는 말은 즉,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정리는 곧 멈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래를 알게 되는 순간 우리들은 생성의 세계에서 멈춤과 소멸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죽음을 앞두고 위대한 음악이나 미술, 책 등 훌륭한 예술 작품을 생성해 유작으로 남기는 예술가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그 작품을 만들어낼 때 과연 "생성, 활기, 미래, 꿈" 이런 것들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테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리, 소멸, 마무리, 미련, 후회, 끝" 이런 감정을 담아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


우리는 죽음 앞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끝이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것만도 무지막지한데 그것이 심지어 끝이라니, 이 막강한 무기력 앞에 인간이 과연 어떤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끝이 결정된 사람 앞에 그 어떤 선택이 희망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으랴. 그래서 미래를 알게 된다는 것은 멈춤을 의미한다. 그것이 꼭 죽음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부와 명예 같은 성공도 마찬가지일 테다. 결과를 알고 하는 게임만큼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도 없다. 그곳에는 아무런 흥미도 스릴도 노력도 여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정해진 매뉴얼대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다.


될 대로 돼라, 진인사대천명이니, 인간은 결국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사실 세상의 모든 말과 진리, 어떤 통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태초의 지구가 어떤 한 점에서 시작되었든 인간의 모든 사상과 자연의 진리도 어느 한 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