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가치
15년 전, 교통사고의 피해자가 되었다. 약 8개월 정도의 입원생활을 끝내고 천천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뒤 병원을 걸어 나오던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사고가 난 터라 진급을 하지 못하고 다시 동학년으로 복학을 앞두고 있던 상태였다. 3월이 되기엔 아직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면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데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겼을 테지만 당시에는 젊은 혈기에 일분일초라도 집 안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으니 신체에 무리가 가는 활동이나 운동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고 당시에 생각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야외활동은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걷지 않고, 오래 서 있지 않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만을 고려 대상으로 삼았다. 이렇게 조건을 설정하고 나니 선택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의 종류는 많지 않았다. 만화책방, 편의점 정도로 추려졌는데 마침 집에서 3분 거리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모집공고를 정말 우연히도! 알게 되었다.
사전에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둔 사람에게 그 조건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는 용기가 생긴다. 결과에 따라 그것은 무모함이 될 수도 있을지언정, 선택의 순간만큼은 완벽한 결단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렇게 편의점 사장님과 마주 앉아 면접을 보고 다음날부터 출근하라는 허가를 받아낸 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의 한숨과 마주했던 것이 떠오른다.
시급 2300원
당시 최저임금은 3200~33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최저임금을 지켜주는 사업장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편한 아르바이트 자리로 취급되는 편의점이나 만화책방 같은 아르바이트 자리는 더더욱 제대로 된 수당을 챙겨 받을 수 없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지금에야 공론화가 가능한 루트가 다양화되었기에 사업주가 최저 임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지만 15년 전만 하더라도 스마트폰이나 sns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고 인터넷 게시판에서 공론화시킨다 한들 다른 채널로 확장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암묵적인 룰이 유지될 수 있었을 테다.
그렇게 시간당 2300원의 시급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두 달 정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조용했던 동네라 저녁 9시만 넘어가면 손님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해가 뜨기 전 새벽 즈음에 당일 물량 들어온 것을 정리할 때가 아니면 카운터에서 벗어나서 걸어 다닐 일도 없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 앉아있을 수 있었기에 업무 강도는 매우 약한 편이었다. 오히려 손님이 없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새벽의 무료함을 버텨내는 것이 힘들다면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편의점 일에 익숙해지게 되자 잠들어 있었다면 고프지 않았을 배가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고파오는 것이었다. 생체리듬이 바뀐 탓인지, 갓 스물을 지난 청년의 신체가 새로운 활동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특정한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왔다.
그때 한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스모그 치킨! 닭다리를 훈연하여 진공 포장한, 편의점에서만 판매하는 간편식품. 당시 스모그 치킨의 가격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나의 한 시간 아르바이트 시급과 정확히 똑같은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2300원 앞에서 머뭇거림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더라면 별생각 없이 사 먹었을 그 닭다리, 아르바이트 시급으로 최저임금이었던 3300원을 받았다면 조금은 덜 망설였을지도 모를 그 닭다리, 그렇게 나의 한 시간의 가치가 배고픔을 달래줄 눈앞의 닭다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며 나의 시간이 곧 돈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한 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을 물질적 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는 나의 한 시간을 2,300원에 팔기도 하고 과외를 하여 20,000원에 팔아보기도 하였다. 심지어 고 3 때 해본 생애 첫 아르바이트였던 신문배달은 노동력 착취 수준에 해당한다. 새벽 2시~5시에 진행했기 때문에 야간 수당까지 쳐줬어야 마땅하지만 야간 수당을 빼고서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더라도 시급 1,000원이라는 금액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금액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런 경험들이 몇 번 쌓여 나중에는 처음 했던 말과 달리 월급날이 되어 최저 임금을 계산해주지 않는 사업자를 경찰에 신고하여 결국 그 돈을 받아내기도 하였으나 뭣도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그저 까막눈이었던 탓에 잘못된 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 살았던 셈이다.
동일한 시기에 같은 사람의 노동력에 대해 이렇게 다른 가격이 매겨지는 것을 경험하며 돈과 시간이 참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느꼈다. 삶의 모든 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자본주의만큼 잔인한 계산법이 없다는 것, 노동을 하고 살아가는 이상, 시간과 재화를 교환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참으로 천박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가장 사실적인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 나의 한 시간은 얼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뼛속까지 자본주의적인 호기심이 솟아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철학적인 생각을 동시에 한다.
최근 듣고 있는 철학수업의 선생님께서 나의 고민을 듣더니 솔직해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솔직하게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솔직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지 진심으로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모양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다.
솔직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나에게 닥쳐올 비난과 좋지 못한 말들을 견뎌낼 용기가 없는 탓이다. 철학을 공부하고 주변에서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배우고 느끼고 깨닫지만 나의 행동으로 옮겨내기까지는 아직까지도 어려움이 있다. 완벽히 솔직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합리화를 해보지만 개운치가 않다. 어떤 방향으로든 솔직한 사람, 단호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탓에 자괴감에 빠진다.
최근 한 동료 교사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는 모임이 있어?" 감추고 숨기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에게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어른들이 많은 조직에서 막내로 살아가며 조심하고 내 뜻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화합과 평온만을 그리며 지내왔던 나의 모습이, 온몸으로 솔직하게 부딪히며 삶을 살아내는 그에게는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철학수업의 선생님과 동료 교사의 포개어지는 물음에, 아니라고 나는 솔직하게 살고 있다고 망설임 없이 답을 했지만 그것이 정말 답이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쌓인다. 나는 정말 나에게 솔직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애정 어린 질문은 순수한 호기심 혹은 진심 어린 걱정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담긴 고마운 질문을 던져준 두 사람 덕에 조금씩이지만 내 안의 무엇인가가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