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에서 자유로, 자유에서 기쁨으로

나는 지금 어디쯤인가

by 정 호
나한테 딸린 가족이 몇 명인데...


흥부처럼 혼자서 가족을 봉양해야 하는 가장의 어깨에는 무겁다는 말로는 결코 그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중압감이 스스로 맡은 바 최선을 다하기라도 하려는 듯, 기꺼이 책임을 짊어지기로 결정한 그 비장하고 안쓰러운 한 사람을 아래로 아래로 최선을 다해 찍어 누른다.


책임은 그런 것이다. 자의에 의해서 기꺼이 짊어지기를 결정할 수 있는 책임은 고결하고 숭고하지만 비참하지 않다.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개인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참함이 포함된 책임이다. 내가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결정하기도 전에 어깨에 누군가가 턱 하고 올려두는 것. 나의 의견이 반영되거나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내 두 발은 칭칭 감긴 채 백 미터 경주 트랙 앞에 세워지는 것. 이런 종류의 책임은 개인에게 어떠한 영광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영광은커녕 울분과 후회, 억울함과 증오가 뒤죽박죽 뒤섞여 오랜 세월 마음 깊은 곳을 갉아먹어 대다가 어느 순간 기어코 폭발해버리고야 마는 폭약이 되어 언제든 터질 순간만을 기다리며 분노의 카운팅을 하고 있을 테다.


우리는 책임이라고 하면 흔히 전자보다 후자를 쉽게 떠올린다. 쉽게 떠올린다는 것은 그것이 좀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례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멋지고 귀한 것은 좇아가야 마땅할 테지만 사실 그보다 급한 일은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해결하는 일이다. 멋진 책임감보다 비참한 책임에 대해 먼저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어린아이로


니체는 말했다. 인간의 정신은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발전해 나간다고, 모두가 어린아이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이전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고.


낙타는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정신이다. 의무와 책임에 짓눌려 힘들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기쁨을 찾는다.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 수준에 머물다가 인생을 마무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과 대부분의 도덕적 잣대들은 하나같이 "책임"을 거의 최선의 가치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어떻게, 자식 된 도리로, 나이깨나 잡수신 양반이, 어린애가 되바라져서는, 목사라는 사람이, 선생이라는 작자가, 판검사 씩이나 되어서는, 너는 유치원생도 아니면서, 군인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이처럼 우리는 얼마나 다채로운 책임의 퍼레이드 속에서 그 역할들을 시시각각 충실히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책임은 물론 중요하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가 타인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이 책임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이라는 가치를 기준으로 두고 생각해 봤을 때 책임은 과연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 반드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자의 정신은 자유의 정신이다.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정신이다. 이는 언뜻 자유로워 보인다. 본인이 원하는 길을 향해 자신 있게 달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불완전하다. 욕망은 필연적으로 갈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직 최종 단계의 정신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어린아이의 정신 단계에서는 책임의 중압감도, 자유를 향한 열망도 없다. 그저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본질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려 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즐기는 인간, 즉 유희의 인간이다. 요한 하위징아가 정립한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은 어쩌면 니체에게 빚을 진 채 탄생된 개념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이와 같은 세 단계의 과정을 걸쳐 발전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정신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을 놓고 보았을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혹은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 처음 무엇인가를 배우고 적응해나가는 신입 시절이면 우리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고 만다. 그렇게 버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버벅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임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책임감을 넘어선 뒤 본인의 이상과 목표를 향해 힘껏 달려도 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시간을 쪼개가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깨닫게 된다. 고갈되어가는 현재와 그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는 현재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제야 유희의 인간, 어린아이의 정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단계를 밟아 나갈 것 없이 단번에 어린아이의 정신이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면 좋을 텐데 우리는 왜 그러지를 못하는가. 니체에 따르면 이 세 가지 단계는 반드시 순차적으로 발달해 나가기 때문이다.


의무를 다 해본 뒤에야 자유에 대한 갈증이 생기고, 자유와 욕망에 대한 몰입의 시간 이후에서야 성취보다 기쁨이 더 상위의 가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끝까지 가본 뒤에서야 그다음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능력과 그릇은 개개인마다 다르기에 멀리서 바라보았을 땐 고작 그 정도 책임의 무게가, 고작 그 정도 노력의 열정이 너의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비난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본인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의 무게와 본인이 최선을 다해 도달하고자 했던 욕망의 끝은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히 알 수 있.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자 책임을 질 만큼 져봤으면, 욕망을 향해 달릴 만큼 달려봤으면 이제는 즐거움을 따를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는 다 내려놓았다


정점을 찍어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제는 다 내려놓았다"라는 말이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책임의 무게를 짊어질 만큼 짊어져 봤고 욕망의 소리에 귀 기울일 만큼 기울여 본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야 도달하게 되는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내려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 내려놓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내려놓을 수 없다. 책임을 져본 적도 열정에 따라 살아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어디쯤의 책임까지가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였는지, 어디쯤의 열망까지를 내 피와 살을 깎아내더라도 도달해보고 싶은 지점이었는지 숨을 헐떡거려본 사람들만이 그 경계에 가까스로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이후 마지막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밝게 빛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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