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 한잔을 기울이다 보면 기쁨을 발산할 줄 아는 누군가의 입에선 으레 반가움의 표식으로 이런 말이 흘러나오곤 한다."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였지?"
코로나 탓에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만남의 간격은 더욱 벌어져간다. 분기별로 한번 정도는 봐왔던 친구들을 일 년에 한 번 보기가 힘들고, 일 년에 한 번 보던 친구들은 이삼 년째 못 보고 지내기도 한다.
깊은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는 늘 진한 즐거움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일과 가정, 그리고 자신을 찾는데 쏟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서 어린 시절 늘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은 조금씩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렇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시간은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점점 더 그 간격을 벌려나갈 줄만 알지 도무지 좁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면 왜 항상 마지막으로 만났던 시간을 반추하고 헤어질 무렵에는 반드시 다음을 기약하는 것일까?
아이들의 다음에 보자는 인사말 속에는 그저 기쁨만이 스며있다. 그들에게 다음은 내일 혹은 모레 정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다음에 보자는 인사 속에는 당부의 마음이 스며있다. 언제라고 콕 집어 기약할 수 없기에 그때까지 서로에게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 애써 너와 나 사이의 마지막 시간의 접점을 찾아내려는 이유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는 문득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느낌에 고개를 휘저으며 술잔을 넘기는 것으로 불안을 떨쳐내 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감상적이기만 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마지막인 줄 모른 채 맞이하는 수많은 마지막들을 얼마나 무수히 흘려보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순간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무수한 순간들이 우리 인생 곳곳에 포진해있다.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누군가와 만나는 마지막 시간들이 있다.
우연히 길을 가다 졸업시킨 제자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한한 반가움과 기쁜 마음에 잠시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이 된다. 하지만 졸업식 이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마주하지 않는 제자들이 아마도 훨씬 많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졸업식은 얼마 안 되는 공식적이며 인식 가능한 마지막 인연의 순간인 셈이다. 그래서 졸업식 날이면 한마디의 말, 한 번의 눈길에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나와 그들의 인생에 다시는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지 못할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일한 장면이니까.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일 테다. 살아가며 마주하게 될 모든 마지막 순간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두 발이 꽁꽁 얼어붙어버릴지도 모른다.아니 그렇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모두 미완인 채로 끝나버리는 셈이다.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기에 다행이지만 달려도 달려도 완결 지을 수 없는 과정이기에 때로는 지난하기도 하다.
가까웠던 친구도, 찾아뵙던 스승도, 명절에만 보던 친척들도, 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장 동료도, 무언가를 함께 도모하던 사람들도, 매일 보는 가족들도, 언젠가는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인 줄 모르는 채.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한없이 소중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만 이것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한다고 쉽게 해낼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가끔씩은 오랜만에 내 앞에 나타나 준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유한함을 사랑하는 길이자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며 나를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