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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Mar 21. 2022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인가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도처에 널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일은 가능성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과 감정이 드는 상태 그 자체는, 개인의 인지적 능력이나 마음의 크기처럼 개인의 경험 혹은 능력에 의해 구성되는 일종의 틀을 벗어나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며 불가항력적이다. 간장 종지에 온 가족이 먹을 찌개를 담을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해해보려 노력을 한번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의미 있는 행위이다. 끝끝내 이해를 할 수 없을지라도 그러한 노력은 개인의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종종 산책을 한다. 아니 산책이라기보다는 관찰을 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합하겠다. 산책의 사전적 의미는 건강을 위해 천천히 걷는 행위를 뜻한다. 다만 나의 경우는 걷기도, 뛰기도, 자전거를 타기도, 버스를 타기도, 자가용을 타기도 하면서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행위를 즐겨하는 것이니 걷는다는 행위 자체보다는 바라본다는 행위에 더 초점을 두는 편이 맞겠다.    


그렇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간혹 스쳐 지나가는 어떤 감정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것은 기쁨의 범주에 속하는 감정일 때도 있고 슬픔의 범주에 속하는 감정일 때도 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오탈자가 난 채로 걸려있는 간판을 바라볼 때면 그 정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겠다는 가게 주인의 삶의 자세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그 투박함과 당당함에 미소가 지어질 때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저렇게 허술하게 장사를 해서 도대체 생계유지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며 가족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울까 싶은 마음에 고개가 저어질 때도 있다.


부동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 몇 년 전국이 부동산으로 들썩이고 있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전과 달리 몸으로 직접 체감이 되는 이유는 내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가정을 이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주변에서 부동산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학창 시절엔 뉴스에서나 떠들 뿐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부동산 문제가 이제는 나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꽤 비중 있는 문제로 전환되어버렸다.   


전국이 부동산으로 들썩이면서 그리고 정권이 바뀌며 앞으로는 재개발 재건축 규제를 풀어 소위 말하는 재재 쪽으로 투자 열풍이 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이곳저곳 재개발 재건축 아파트들이 하나씩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며 그럴 때면 어디에 투자를 미리 해야 한다느니 어디가 몇 년 후에는 천지개벽을 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한데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경제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끝에 가서는 "나도 돈 있으면 하나 사놓고 싶다", "결국 현금 있는 놈들이 돈을 번다"라는 식으로 씁쓸하게 마무리될 때가 많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그곳에 원래 살고 있던 돈 없는 토착민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 중인 구역이 있다. 재건축은 한 단지 혹은 몇 단지의 아파트를 묶어서 기존 아파트를 헐고 그 위에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것을 뜻하며 재개발은 동네 하나를 통째로 갈아엎어 그 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통상 재건축보다 재개발이 구역의 범위도 더 넓고 거주자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단독주택, 아파트, 빌라, 논밭, 상가 등)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진행과정이 복잡하고 기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게 갑자기 근교의 대규모 재개발 구역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집을 나섰다. 해당 지역은 이주 및 철거가 진행되는 단계로 동네의 모든 집이 비어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지역 내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번화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재개발 해당 블록 안으로 조금 들어섰더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자동차 소리는 들을 수가 없이 고요하며 걸어 다니는 사람이나 주차되어 있는 차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한 시간 가량을 걸어 다니면서 마주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한 사람은 학원을 가기 위해 그 구역을 가로질러가는 학생인 듯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가만히 서서 어떤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해당 지역 안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일분 전까지만 해도 온갖 프랜차이즈와 주유소, 버스정류장 관공서 상가건물 아파트 등이 즐비하여 범죄가 벌어질까 우려하며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필요성이라고는 전혀 느낄 필요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대로변을 걷고 있었는데 고작 한 블록 돌아 들어왔을 뿐인데 갑자기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며 나도 모르게 긴장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거리상으로는 백 미터도 되지 않을 텐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부분적으로 부서져 폐허가 된 건물들, 그런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 불규칙하게 똬리를 틀고 자리 잡은 식물들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함께 스산함을 자아낸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2층, 3층 구조의 오래된 빌라와 세월을 못 이기고 페인트가 벗겨진 상가 간판들, 아파트라고 하기엔 작고 빌라라고 하기엔 큰 소규모 아파트도 한동 세워져 있었지만 그곳에 주차된 차는 거의 없었다. 너무나 고요한 탓에 지저귀는 새소리나 떨어지는 물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한다. 그렇게 주욱 해당 지역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다음 어디인지 모를 좁은 골목을 지나 대로변으로 나오니 낯익은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습게도 그 순간 작게 내쉬어지는 안도의 한숨이 어찌나 크게 느껴지던지, 한 시간 동안 꽤나 긴장된 상태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다.   


간혹 재개발 예정지역이나 재건축 예정지역 근처를 이렇게 걷고는 한다. 이런 긴장감은 개발 지역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 생생하게 체감된다. 규모가 클수록 한번 발을 들이면 그곳을 빠져나가는데 더 시간이 오래 걸리며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차나 자전거처럼 이동수단을 타고 둘러보는 것보다 걸어서 둘러보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동수단 안에 있다는 것은 안전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에서는 오감이 살아나지 않는다. 자동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이 그저 두 발로 걸을 때에는 오감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지며 해당 구역은 우범지역이므로 cctv를 통해 상시 방범 경계를 하고 있다는 현수막은 오감을 더욱 예민하게 각성시킨다.     


글을 쓰다 보니 꽤 위험해 보인다. 실제로 재개발 재건축 지역은 우범지역으로 분류된다. 인적이 드물고 공가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범죄 행위를 저지르기에 안성맞춤인 탓이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현실에서 범죄 장소로 자주 선택되는 곳이 바로 폐건물, 폐가, 그리고 공사가 아직 진행되지 않은 재개발지역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논밭이, 무너져가는 집 한 채가, 가지고 있던 땅이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어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재개발 재건축에 대한 환상이 생기며 어디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런 곳의 땅 좀 미리 사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쉽게들 한다. 하지만 별다른 욕심 없이 그저 살던 곳에서 죽을 때까지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노부부의 이후 행방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사 기간 동안 발생할 소음과 분진 일조권 침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재개발로 인해 주변 땅값과 상가 월세가 올라 발생하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는 자주 거론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큰 부자는 될 수 없을 테지만 물려받은 빚만 없다면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고 예전보다 권위가 떨어졌다고는 해도 자기 자식이 되었으면 하는 직업군으로 아직까진 몇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것을 보면 사회적 인식이 그리 나쁜 편도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성이 뛰어난 직업이다. 다만 그런 까닭에 불안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도 쉽다.


좋은 교사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기준으로 좋은 교사에 대해 정의 내릴 테다. 교과목을 재미있고 잘 가르치는 교사. 아이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교사. 권위와 친근함 사이를 잘 조율해내는 교사. 하루에 한 번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교사.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좋은 자극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교사... 모두 훌륭하고 모범적인 교사 상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교사란 아이들의 삶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좋은 교사의 조건이면서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다. 지식의 전달도 친근한 관계 맺음도 권위의 수립도 좋은 역할 모델이 되어주는 것도 삶에 도움이 되는 동기를 부여하는 일도 모두 아이의 삶을 읽어낼 수 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은 그래서 편협하다. 적어도 학생 앞에 서는 교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해를 못 할 수는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못 하는 것,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자신의 삶의 범주를 벗어난 삶은 무한에 가깝도록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를 못 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곳에서 멈출 때 그것은 이해를 안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 되어버린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해를 안 하겠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삶을 읽어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의 삶을 읽어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특히 교사라면 이해의 폭을 넓히려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교사는 그 아이의 곁에서 삶을 읽어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화도 좋고 책도 좋고 봉사활동도 좋을 테다. 각자의 마음에 와닿는 쉽고 끌리는 방법들을 찾아 스스로에게 자주 자극을 줘야 한다.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내 기준에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만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왜 그런 말과 행동과 선택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을 자꾸 바라보고 그 원인을 파악하려 애써봐야 한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것만 바라보며 살아서는 결코 새로운 풍경을, 새로운 사람을 마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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