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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n 22. 2022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프레임 깨 부수기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가르치려고 하고 있네


교사로 살며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다. 도대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런 식의 무례한 말을 교사라는 이유로 듣게 되는 것일까? 정말 교사라는 인간들은 직업적 특성상 무언가를 지적하고 교정하고 훈수를 두는 것이 습관화되어 타인을 가르치며 고나리질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일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는 주요한 원인이 교사들이 태생적으로 아는 척하는 것을 좋아하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서라기 보다는, 교사의 부연 설명이 지나치게 세세하거나 인과관계를 따지려는 태도 때문인 때가 더 많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어째서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을 곁들이기를 좋아하고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일까. 한 직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성향을 일반화시키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는 글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이미 세상에 유통되는 교사의 이미지가 그렇다고 한다면, 게다가 그 이미지에서 비롯된 문장(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때문에 왕왕 기분이 상할 바에야 차라리 고정된 이미지를 톡 까놓고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이야기를 풀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는 설명하는 사람이다.


지식을, 세상살이를,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아이가 알아야 하는 것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법한 것을,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교사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들이 그렇다. 특히 고등보다는 중등이, 중등보다는 초등이, 초등보다는 유치원이, 나이가 어린 학생을 대할수록 더욱 자세하고 상세하게 말해야 한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입버릇이 스며있을 확률이 높다. 가르치는 대상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와 자세하고 명확한 보조 자료들이 있어야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데 수월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교실에서 끊임없이 설명을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아이들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략적인 설명은 세상을 왜곡되게 이해하게 만든다. 본인의 한정적 경험에서 비롯된 배경 지식에 한해 이해를 시도할 때 얼마나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가.

 

직업적으로 그런 생활을 해온 탓에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다른 직종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자세하고 세부적인 설명을 덧붙일 때가 많다. 이것을 단순히 직업에서 비롯된 습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본다면 배려를 몸에 익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상대방이 개념을 오해하지 않고 보다 정확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세함을 덧붙여주려는 마음, 그것은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성인들 간의 교류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마음씀의 메커니즘이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숫자에 밝다는 말을 한다. 이를 두고 단순히 사칙연산에 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테다. 그보다는 수와 관련된 개념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해내며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할 테다. 즉 수에 밝다는 말은 수와 관련된 감각이 예민하게 갈고닦아져 있어 언제든 빠르게 반응하고 대처하며 풀어낼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재에 밝다는 말 또한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게 볼 수 있겠다. 이재에 밝다는 말을 단순히 재물을 탐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재물의 속성과 이치를 깨닫고 돈 버는 방법을 파악하여 돈을 실제로 잘 벌고, 그러한 과정 안에서 세상을 복합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고 봐야 더 정확할 테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선생이라서 가르치려고 한다는 말의 뜻을 한번 생각해 보자. 선생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앞서 이야기한 숫자에 밝은 사람이나 이재에 밝은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폭넓게 생각해볼 때와 동일하게 생각을 확장시켜 본다면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습득된 태도가 삶에 내재되어 언제건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를 풀어낼 줄 알게 된 사람이라고 보아야 조금 더 적절한 것은 아닐까.


가르치려 하는 것과 오차 없이 개념을 온전히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문제는 그것이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구분 지어진다는 점이다. 친절하고 상세한 배려와 대략적인 무뚝뚝함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런고로 척하면 척이고, 아 하면 아! 하는 세상 속에서 어쩌면 교사는 뒤쳐지고 부진한 길을 걷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 용어 가운데 업보라는 말이 있다. 본인이 그동안 쌓아온 잘한 일과 잘못한 일들이 등 뒤에 쌓이고 쌓여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옴을 뜻한다. 이때 업이라는 단어에는 일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업보라는 말을 다시 바라보면 일을 하며 쌓아온 내 삶의 보따리 정도로 달리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모든 업에는 저마다의 업보가 분명 있다. 선생이라서 가르치려고 한다는 말은 때에 따라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업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분명한 것은 교사의 업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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