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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년을 읽다

어떤 소년을 읽어줄 것인가

by 정 호

우연한 기회에 소년원에서 1년 동안 수업을 하게 된 어느 국어교사의 이야기. 우연과 그로 인해 맺어지는 인연이 우리의 사고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최근 익산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사안이 교직 사회에서 화두로 떠올랐다. 학폭 사안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더 이상 특별하게 다루어지기 힘들 만큼 만성적인 이슈가 되어버렸지만 해당 사건에서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인 한 명의 학생 앞에서 교실과 학교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는지, 교사와 학생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지 학부모들은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년원을 주제로 다룬 책을 읽게 되다니 책과의 만남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못지않은 우연과 타이밍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원 직원의 감정보다 소년의 감정이 더 신경 쓰였다. -26p


세상에 악인은 없다. 그들은 그저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거나 관계없는 사람일 뿐이다.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은 분명 사회적 규범과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판사에게 8호 이상의 처분을 받은 아이들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본다면 분명 죄질이 좋지 않음이 분명하다. 다만 작가는 그런 아이들과 우연한 기회를 계기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야 말았다. 책과 글을 매개로 아이들의 삶이 조금씩 눈에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그 아이들에게도 분명 사연이 있었겠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이 한없는 벼랑 끝으로 그들을 몰아 댄 무자비한 공포와 저항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겠지. 그렇게 소년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 그저 악인일 뿐이었던 한 인간은 사연을 가진 안쓰러운 사람으로 다가오게 된다. 바닥까지 추락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 마음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번이라도 따스함을 느낄 수만 있었더라면, 서로의 세상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더라면 그들은 결코 바닥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차원에서 작가는 소년들에게 희망이자 새로운 세계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통로였을 테다.



사진의 레스토랑 예쁘지? 저기가 쥬제뻬가 운영하는 시칠리아 식당의 정원이야. 야외 테이블에서 저녁 먹으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과 저기에 가게 되면 내가 소개해서 왔다고 쥬제뻬에게 꼭 말해. 아마 더 맛있는 음식을 해줄 거야. 의도를 지닌 이야기였다. 소년의 마음에 하고 싶은 일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 의도 - 54p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은 달려낼 수 있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느리더라도 꾸역꾸역 그곳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다. 무의미한 삶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목적을 갖는 것은 그래서 가치롭다. 동기를 부여하고 그것은 살아낼 힘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삶의 공허함을 일시적으로나마 달래줄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목표 설정일 때가 많다. 저자의 국어수업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 형태의 삶을 살아낸 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소년들은 그들의 삶 안으로 최초의 어른을 들인다.



아이들에게 솜사탕을 주었다. 그러고 싶었다. 솜사탕은 어른이 아이에게 주는, 그것도 사랑스럽게 여기는 아이에게 어쩌다가 드물게 한 번, 선물로 주는 간식이다. 집에서 먹는 일상의 간식은 아니다. 솜사탕이라는 말 앞에서 이런 풍경이 떠오른다. 어린이날 나들이 가서 아이가 풍선처럼 매달린 솜사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 엄마나 아빠가 큰 마음먹고 하나 사서 아이 손에 들려주는 풍경(중략) 솜사탕을 주는 마음. 이 마음은 '네가 아이 같다, 귀엽다, 사랑스럽다.'와 같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주고 싶었다. 솜사탕을 주니 소년들이 피식 웃는다. - 135p
민우는 생애 17년 만에 첫 번째인 일이 두 가지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는 책을 만났고,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어준 최초의 어른이 생겼다. 이 사실이, 나는 눈물겹다. - 155p
십 대 후반에 비로소 책과 만나게 된 소년이 책과 나누는 첫인사. 이 첫인사가 귀하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곧 씁쓸해졌다. 이렇게 멀쩡한 소년이 감옥에 와서야 책과 조우하게 되었다니... - 203p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교사라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 역시 그런 교사 가운데 한 명임이 분명해 보인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교사라는 업에 몸담은 채 오랫동안 버텨내기 어렵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학생, 내 의도를 곡해하는 학생, 내 노력이 통하지 않는 학생,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학생, 최선을 다해 나의 능력과 마음과 노력을 쏟아내도 한 사람의 삶에 어떠한 긍정적 변화도 끌어낼 수 없음을 마주하게 되는 무수한 순간들, 이처럼 교사의 시간은 실망의 연속이자 실패의 연속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효과를 믿고 나아가려는 힘은 바로 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 순간, 나의 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겨를 없이 무너진다. 무너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벽 아니었을까. 그 벽의 한 귀퉁이가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틈으로 이 녀석의 존재가 현실의 무게로 묵직하게 전해져 온다. 이 녀석이 나에게 아무 끈도 닿아 있지 않은 타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신호다. - 46p
민우라는 아이의 기질을 몰랐더라면 6개월 간의 은신을 게으른 성질 탓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이렇게 대책 없이 무기력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스치듯이 했을지도 모른다. 민우라는 아이가 어떤 성품과 기질을 지녔는지 조금 알고 나니, 그런 정황이 짐작이 되었다. - 211p
가해자인 소년을 영원히 가둘 수 있다면 그저 가두면 된다. 가두는 것만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곧 우리의 이웃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엇보다 영혼을 지닌 하나의 존재로 우리 곁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죗값을 치르는 그 '너머'를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다. - 215p


모든 것은 우연한 연결에서 비롯된다. 아이들과 연결되기 이전의 저자였다면 "우리의 이웃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돌아올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두려웠을 테다. 언제든지 재범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에 죗값을 치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불안을 완벽히 해소하기 어렵다는 생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교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은 일정 부분은 소년원에 수감된 아이들을 위한 생각인 것처럼 비칠 수도 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을 위한 생각이었을 테다. 하지만 작가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아이들과 연결되기 시작하며 그녀의 생각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들 역시 "영혼을 지닌 하나의 존재"라는 생각. 이는 연결되기 이전에는 결코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이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보통 내 일이 될 때에서야 행동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전태일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나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행동, 타인의 질타와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저질러버리고 마는 행동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대신 나서 주는 사람은 없다. 나의 일이거나 나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혹은 그에 버금갈 정도로 가까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건을 단순히 세상의 가십거리가 아닌 온전한 나의 일로 여기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감정은 폭발하고 그렇게 터져 나온 감정은 기어코 행동을 낳는다.


주변과의 작은 연결은 중요하다. 한 사람이 세상 전부와 연결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지만 끈끈한 연결망을 늘려갈 때 악행과 악함은 그 추함을 드러낼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시도와 노력은 고귀하며 본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한들 악행의 결과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분명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고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본 아이들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희석되기 어려운 흔적으로 남는다. 저자가 소년원의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삶이 눈에 들어온 것처럼, 피눈물을 흘려가며 피해자의 삶을 두 눈에 박아 넣은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와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소년들을 읽어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소년을 읽어줄 것인가. 그것은 노력의 영역이지만 한편으로는 분명 우연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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