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없지만 귀한 책
사전을 보면 모든 낱말이 분명히 저마다의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낱말에 기대고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이도 저도 아닙니다. 낱말들이 서로를 눌러보고 눌러들어 주지 않는다면 어떤 낱말도 제 뜻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서로 눌러봐 주고 눌러들어 주면서 의미를 찾는 것일 뿐, 낱낱의 삶은 어차피 다 이도 저도 아니니까. - 91p (눌러듣다, 눌러보다.)
빨다리다 : 빨고 짜고 널고 다리는걸 한 번에 표현하는 단어. - 135p (빨다, 빨다리다.)
한국 전쟁이 터져 온 가족이 피란길에 올랐다가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온 날, 남자의 할머니는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밥을 안치고 텃밭에 일구어 두었던 열무를 뽑으려다가 그만 불발탄이 터져 폭사했단다. 남자의 할아버지가 얼른 할머니에게 달려가 보니 배가 터져 창자가 쏟아져 나왔는데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고. 남자의 할아버지는 부랴부랴 할머니를 안고 냇가로 뛰면서 남자의 아버지에게 쏟아진 창자를 들고 따라오라고 외쳤단다. 남자의 아버지는 제 어미가 쏟아 놓은 창자를 손에 들고 아버지를 따라 냇가로 뛰어가서는 흙이 잔뜩 묻은 창자를 씻어 다시 어미의 배 속에 넣으려 했지만 그땐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고.
"그때 아버지 나이가 열다섯이었어요. 어미의 창자를 손에 그러담고 냇가로 뛸 때 창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을 겁니다. 애끊는 심정이나 애끓는 마음이라는 말, 전혀 과장된 게 아닌 셈이죠. 아버진 돌아가실 때까지 열무는 전혀 입에 대지 않으셨어요." - 155p (애끊다. 애끓다.)
국어사전에서 동사를 찾다 보면 말이죠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로 끝난다는 겁니다. 기본형 종결어미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그것은 족쇄입니다. 동사를 기본형으로 쓰는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본형이라는 것은 현실에는 없는 허상 같은 겁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어요. 나 말입니다. 마치 나라는 사람의 기본형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제의 나를 얽어매고 옭아매는 족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 157p (얽어매다, 옭아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