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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하지 마

단호한 거절의 미

by 정 호
아빠: 우와 오늘 목욕 진짜 오래 했다 그치

아들: 아니야 조금 더 해

아빠: 두 시간이나 했는데? 손가락 한번 봐 쭈글쭈글해졌지? 더 오래 하면 손가락이 초콜릿처럼 녹을지도 몰라

아들: 아니야 안 녹아

아빠: 알았어 그럼 아빠 먼저 머리 좀 감을게. 샴푸가 어디에 있지~

아들: 나한테는 샴푸 하지 마


두 시간 씩이나 목욕을 해놓고도 더 긴 시간 물놀이를 하고 싶어 억지를 부리는 모습과, 그에 더해 샴푸로 머리를 감겠다는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혹여나 자신의 머리를 감길세라 곧바로 나한테는 샴푸를 하지 말라는 단호한 괴성을 내지르는 아이의 모습이 포개져 그 귀여움에 흠뻑 취해 혼자서 한참을 웃었다.


뭐가 웃겨서 그렇게 혼자 웃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빠를 잠시 쳐다보던 아이는 물놀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는지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포동한 볼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놀잇감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움받을 용기,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거절당하기 연습과 같은 류의 책들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용기 있게 거절하여 자유를 쟁취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거절을 힘들어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인지, 유교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있는 동양인의 특징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는 대체적으로 적용되는 감정이라는 것이 살아갈수록 점점 더 피부로 느껴진다.


거절은 불편하다. 거절을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모두 불편하다. 하여 "좋은 게 좋은 것"이 유독 강조되는 집단주의, 가족주의, 구조주의의 화신이라도 자처하려는 듯해 보이는 한국사회의 기묘한 분위기는 늘 우리 주변을 휘감아 돌며 거절의 "거"라는 말만 꺼내려고 해도 금세 눈치를 채고 용기를 내려는 한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해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을 잃고, 색을 잃고, 나를 잃어간다. 집단에서 다 같이 해야 하는 것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보편적인 취향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독특하다거나 개성이 있다는 식의 칭찬을 가장한 표현으로 "저놈은 이상한 인간이야"라는 자신의 본심을 에둘러 숨긴다.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짐승의 세계에서만 위협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간 역시 짐승의 그것에서 한치도 진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두 손을 쓸 수 있게 되어 기능적인 섬세함을 갖추었기 때문에 짐승들이 하지 못하는 고기능의 사회, 문화, 예술적 활동들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 그 욕망의 근원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결국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진화하지 못했다는 생각.


거절을 두려워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까 걱정되는 마음, 타인으로부터 미움받을 것이 두려운 마음, 그로 인해 사회적 자본을 획득함에 있어 한발 멀어질까 하는 걱정.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인 외로움과 고독을 빚어낼 것만 같은 공포.


이런 모든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아이의 한마디는 그래서 명쾌하고도 강렬하다. 나는 아직 샴푸로 머리를 감기 싫으니 나한테는 하지 말라는 단호한 아이의 한마디 말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가.


니체는 인간이란 존재는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 같은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초인(위버멘시)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했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쩌면 아직 낙타의 수준에 머무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절제의 미덕, 책임감과 인내심을 바탕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해내려는 사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홀로 되는 두려움에 가짜 소속감에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하지 마! 싫어! 나는 이게 좋아!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아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늘 아이로부터 배운다. 아이야 언제나 너의 말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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