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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대한민국

내 것이 최고야

by 정 호
아들: 아빠 나랑 같이 국기 찾기 보드 게임하자.

아빠: 그래! 아들이 가서 가져올래?

아들: 그래 좋아!

아빠: 같은 나라 카드를 두 개 먼저 찾으면 가져가는 거야!

아들: 응! 나는 대한민국을 먼저 찾을 거야

아빠: 왜 맨날 대한민국을 제일 먼저 찾아?

아들: 내가 좋아하는 나라니까

아빠: 대한민국이 왜 좋은데?

아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니까.


요즘 4살 아들과 놀아주는데 보드게임이 톡톡한 효자노릇을 한다. 얼음깨기나 메모리 게임, 할리갈리 컵스 같은 단순한 규칙의 보드게임 몇 종을 돌려가며 아이와 함께 놀다 보면 웃고 떠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의 기억력이나 순발력이 점차 발달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어 놀면서 공부한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메모리 게임의 일종으로 여러 나라의 국기를 보이지 않게 거꾸로 뒤집어 둔 뒤, 순서를 정해 번갈아가며 자신의 차례에 두장씩 뒤집어 같은 국가가 두 개 나오면 해당 카드를 획득해 점수를 계산하는 보드 게임이 있다. 아직 이런 룰을 지켜가며 게임을 할 정도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로 나라별 국기 모양이나 외워보자는 심산으로 내 마음대로 규칙을 바꿔 모든 국가의 국기가 보이게 둔 뒤 같은 국기를 두 개 먼저 찾으면 가져가는 식으로 게임을 진행해봤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아이는 즐거워하며 게임에 참여해주고 있다. 눈앞에 다른 나라의 국기 두 개가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모든 국가의 국기들 가운데 꼭 대한민국 국기를 가장 먼저 가져가려고 찾는 모습이 희한하여 어느 날 문득 왜 대한민국 국기를 제일 먼저 찾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무심하게도 카드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저 내가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심플한 답변을 내놓았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왜 좋아하는 나라인지 물어보는 아빠의 두 번째 질문이 답답했던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는 아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하는 모양새가 아기의 그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만큼 묘한 기운을 풍기는 듯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니까(두 눈을 부릅뜨며)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말투와 표정으로 아비의 우문에 현답을 내어놓는 아들을 바라보며 내 것이 최고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늘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갖지 못한 것을 탐하며 스스로를 고통의 바다로 밀어 넣는다. 타인의 능력을, 타인의 성취를, 타인의 재력을, 타인의 시간을, 타인의 취향을, 타인의 인맥을, 타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아 보이는 것들과 후천적으로 일궈낸 가치로워 보이는 모든 것들, 나에게 없지만 타인은 가진듯해 보이는 그러한 것들을.


그곳이 곳 지옥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초입에 걸린 간판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지옥이란 바로 그런 곳이다. 희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곳.


비교와 질투는 욕망의 원천이 되어 강렬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허무와 좌절로 점철된다. 가진 것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늘 갖지 못한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습관은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인 셈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만 타인은 약 70억 명이고, 그렇다면 최소한 70억 개의 내가 갖지 못한 좋아 보이는 것들이 있는 셈이다. 그중 피나는 노력 끝에, 혹은 행운의 도움을 받아 좋아 보이는 것들을 서너 개 손에 넣게 된다고 한들,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여전히 지옥의 불구덩이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여전히 70억 개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의 마음을 고해의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들은 아들이라서 좋고 딸은 딸이라서 좋다. 엄마는 엄마라서 좋고 아빠는 아빠라서 좋다. 훌륭하고 멋지고 존경할만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자식이고 나의 부모라서 좋다. 모자라고 비루하고 장애가 있고 아픈 곳이 있고 쓸모가 없더라도 좋다. 그저 나의 가족이기에 그렇다.


다른 모든 것들에도 같은 마음을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진 것에서 충만한 행복을 누리며 고통의 바다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다. 다른 이유는 모두 부차적인 셈이다.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그것이 나의 것이며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외부로 던지는 시선을 거두고 나와 내 옆 사람들에게 충실한 눈길을 보낼 수 있다. 그제야 지옥은 내린 적 없었던 한여름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작열하는 태양처럼 삶에 대한 희망만이 뜨겁게 타오르며 눅눅히 젖었던 어깨를 바삭하게 말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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