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처음 생각하던 날
아빠: 아들 여기가 제주도라는 섬이야. 여행 오니까 어때?
아들: 좋아
아빠: 좋았어? 그런데 어쩌지 우리 이제 내일이면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들: 괜찮아. 우리 내일 집에 가?
아빠: 응 하룻밤 더 자고 내일 우리 집에 갈 거야
아들: 그럼 내일 어린이집 가?
아빠: 어린이집은 하룻밤 더자고 모레 갈 거야
아들: 모레가 뭐야?
아빠: 오늘의 다음날이 내일이고 내일의 다음날이 모레야 오늘부터 두밤을 자면 모레가 되는 거야
아들: 그럼 우리 젤리를 사러 가자
아빠: 그래.
(잠시 후 마트에서)
아빠: 젤리 몇 개 살 거야?
아들: 세 개
아빠: 왜 세 개나 사? 하나만 사도 많은데?
아들: 하나는 내거고 하나는 선생님 꺼고 하나는 친구들 줄 거야. 선생님이랑 친구들 것을 내가 미리 챙겨놓으려고.
42개월. 개월 수에 맞는 발달 수준인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아직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자신의 것을 양보하는데 익숙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한 살 어린 사촌동생과 함께 놀 때나 키즈카페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선뜻 내어주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쥐고 있던 것을 선뜻 내어줄 때도 간혹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자신이 가지고 논 뒤이거나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이는 장난감과 간식에 한해 벌어지는 단발성 이벤트 같은 일이었다.
그랬던 아이의 입에서 여행이 끝날 무렵 이틀 뒤 만날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구들을 위한 간식을 사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의 기특함은 뭉클함을 자아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은 엄마 아빠에게도 절대 주지 않던 유아적 식도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까지 챙길 생각을 깨우친 순간이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다른 사람의 입안에 들어있는 것마저 기어코 털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할 것 없이 나 역시 그런 욕심을 부릴 때가 있었다. 나눠먹어야 하는 순간에 내 몫을 더 생각하고, 누가 먹을지 고민해야 되는 순간에 애써 젠틀한 척 양보를 하지만 그러는 동안 속에서는 뜨끈한 불구덩이가 솟아올랐던 경험이 있다.
못 먹으면 혹시 나에게 손실이 생길세라 그저 더 빨리 달리거나 더 나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어떠한 자원(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을 차지하고자 애썼던 기억. 그로 인해 얼마큼의 이득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부끄러움이 일정 부분 이자처럼 따라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나에게 아무런 손실이나 위협적인 상황이 닥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이 스멀스멀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애써 이성의 도움을 받아 그런 위기의 순간을 넘기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면 반드시 불어닥치고야 마는 자괴감에 몸서리를 치며 스스로의 못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곤 한다.
선생님과 친구들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감동과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가 되는 것은 나의 이런 못난 모습 때문일 테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거부하기 힘든 이론적, 경험적 틀에 근거할 때 아이의 발달은 박수를 치며 반길 일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며 이익을 나눌 줄 아는 인간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며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선한 인간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착하게만 굴다가 제 것을 챙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동시에 밀어닥친다. 고작 친구들의 젤리 하나를 산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인가 싶다가도, 배려와 양보가 몸에 밴 사람들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의나 도덕은 저 멀리 던져둔 채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승전보가 더 자주 들리는 현실을 생각할 때 아이에게 무엇을 더 무겁게 가르쳐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들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공공의 적 강철중에서 조폭 보스(정재영)의 아내(추귀정)는 죄를 묻는 경찰(설경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들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이와 비슷한 류의 언급을 얼마나 자주, 쉽게 접할 수 있는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너 얼마나 벌어"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이론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은 그것이 아름답건 추하건 언제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간의 최대 목적이자 유일한 목적은 아닐진대 살다 보니 그것이 유일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때가 참 많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대부분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런 순간들이 불쾌한 이유는 아마도 내가 그것을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내가 그것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두고 당연한 일이며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말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은 패자들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테다. 서로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다. 다만 흔들리지 않고 명확한 지점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부족한 탓에 언제나 삶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녀에게 명확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중에 그런 가치관을 심어준 부모를 원망하면 어쩌나, 혹시 내 생각이 틀린 것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기만 하다. 조금씩 커가는 아이를 마주하며 서둘러 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엄습해온다. 나의 삶과 나의 신념을 바로 세워야지만 아이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쁜 것을 예쁘게만, 고운 것을 곱게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타인을 배려하고 챙기려는 최초의 아름다운 마음과 마주하면서도 그것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에 한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다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을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세상 어떤 것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헷갈리는 것들 가운데 그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삶의 진실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