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Aug 12. 2022

교사의 딜레마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느끼게 되는 감정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어때요?
확실히 공부머리라는 것이 있지요?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공부를 할 때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있는지, 노력은 그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이미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다. 어느 분야가 되었건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그 재능을 노력으로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나의 자녀가 그 재능의 일부라도 쥐고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재능은 존재한다. 내가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같은 시간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월등히 앞서 나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몸소 느꼈던 것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우지 않았음에도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는 아이들을 가끔씩 발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그렇게 떡잎부터 다른, 될 놈들을 하나둘씩 마주해본 경험이 있다. 그들은 열악한 가정 형편이나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거나 서포트를 해줄 부모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기록을 경신하는 스포츠 선수들도 있다. 소위 개천의 용인 셈이다. 하지만 개천의 용이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천재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스스로 깨우친다. 스승의 존재마저 뛰어넘으며 때로는 스승이 필요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도 다빈치, 김웅용, 송유근 같은 천재들의 공통점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제 옹알이를 떼고 더듬더듬 한 두 문장의 말을 하기도 벅찰 나이에 모국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의 말들까지 유창하게 섭렵하고 양자역학이니 상대성이론이니 하는 시대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과학적 지식들을 이해하는 등 평범한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도 도달하기 힘든 인지 수준을 매우 어린 나이에 돌파해버린다. 이런 재능을 가지고 엄청난 성취를 이뤄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재능의 유무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재능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천재를 마주할 일이 거의 없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듯한 재능을 가진 사람의 존재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적당한 재능,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주변에서 간혹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재능 앞에서도 우리는 압도당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될 놈들은 된다니까."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교사로서 받아들이기는 힘든 말이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사람이 정말 재능을 갖추었는지, 그 재능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될 놈은 다 된다"라는 말에 기대어 어떠한 조력이나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 더군다나 공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환경이 조금만 더 갖추어졌더라면 지금보다 더 활짝 필 가능성이 있는 "될 수 있어 보이는 놈"들이 늘 교실에 몇 명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될 놈은 된다는 말은 때로 무책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그냥 다 놔두라는 말인가? 재능 앞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을 끌어안고 살자는 말인가? 확률이 낮은 변수에 기대자는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노력은 대체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교사는 무슨 필요가 있고 부모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다 정해진대로 될 놈은 되고, 될 일은 되고, 다 결정되어 있는 대로 흘러갈 텐데. 철학관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아닌가.


될 놈은 된다는 말처럼 정말 가만히 놔두어도, 뙤약볕과 비바람 속에서도 기어코 자라나고야 마는 잡초의 생명력처럼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기어코 피어나고야 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런 사람들보다 적당한 환경이 갖추어지면 본인의 재능과 맞물려 더 큰 성취와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언제나 더 많다는 것이다.


인생은 확률게임이다. 때로는 낮은 확률에 배팅을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높은 확률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나의 자녀가, 나의 제자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낮은 확률이다. 재능의 유무도 그렇고 나의 판단이 맞을 가능성 또한 그렇다. 둘 다 확률이 매우 낮다.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은 확률을 높이는 일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며 악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차단하는 것. 물론 어디에나 변수는 있다. 완벽에 가까운 환경을 조성해주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부하면 별 수 없는 일이다. 이 역시 변수다. 하지만 변수는 말 그대로 변수이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을 어떻게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겠는가.


진인사대천명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재능의 유무와 판별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환경 조성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변수 역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녀나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뿐이다. 그 이외의 모든 과정과 결과는 내 역량을 벗어난 일이다.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있어 초연해져야 한다. 그것이 오래도록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길이다. 가르치는 일도, 자녀를 기르는 일도, 아니 세상의 모든 일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될 놈을 찾을 것이 아니라 되게 만들어야 한다. 신데렐라는 가고 평강공주가 온다. 그것은 시대적 흐름이자 지혜의 안착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육이란 무엇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